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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뿌리깊은나무, 밀본의 정기준은 실존인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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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일 방송된 SBS 수목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이방원(백윤식 분)이 없애려는 밀본과 그 창시자로 죽임을 당한 정도전, 정도전의 뜻을 전하려는 동생 정도광(전노민) 부자의 이야기가 긴박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이날 방송에서 이도(송중기 분)는 이방원에게 “내 조선은 문으로 치세를 이어가고 무는 영토를 지키는 데에만 쓸 것”이라고 밝힌 이도는 과거 칼과 피로서 조선을 다스린 이방원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합니다. 바로 자신의 조선에 걸맞는 정도전의 조카 정기준을 회상한 것이지요.

  이도의 어린시절 과거시험장에서 ‘나라를 총괄하는 것은 군주가 아닌 재상’이라는 답을 제출한 정기준은 ‘밀본’을 창시한 정도전의 조카로 이 답안에 화가 난 이방원은 그를 잡아들이라 명합니다. 하지만 정기준 부자를 놓친 이방원은 그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수년간 찾아다니고 이후 정도전이 작성한 ‘밀본지사’를 찾은 동생 정도광은 이방원의 수하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는데요.

 여기서 ‘밀본’은 숨겨진 뿌리를 의미하며 꺾어버리면 그만인 꽃은 군주이고 그 중심은 뿌리인 재상에 있다는 것으로, 이 말은 뿌리가 부실하면 죽는 나무처럼 사대부가 튼튼해야 조선을 떠받칠 수가 있으니 나무를 위해 뿌리 중의 뿌리인 밀본이 되어 조선을 지키라는 뜻을 의미합니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조선초 최고 권력자로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은 인물입니다.

  제1차 요동 정벌과 제2차 요동 정벌에 반대하였으나 명나라의 횡포가 거세지자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이성계와 갈등하게 되죠. 그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드라마에서 밀본의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정도광(전노민)이 정도전의 동생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정도광과 정기준은 작가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입니다.

 정도전의 동생은 정도존과 정도복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왕조 실록에는 정도복에 대한 내용이 짧게 등장합니다.
 태종 18권, 9년(1409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8월 19일(무오) 2번째기사
정도전의 동생 정도복을 인녕부 사윤으로 삼다

정 도복(鄭道復)으로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을 삼았다. 도복(道復)은 정도전(鄭道傳)의 아우인데, 바야흐로 정도전이 나라 일을 맡아 그 세력이 조야(朝野)를 누를 때에 〈그 아우〉 도복을 불러 서울에 오게 하니, 도복이 사양하기를,
“세력과 지위는 오래 가기 어려우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한미(寒微)한 가문(家門)인데 영화(榮華)가 이미 지극합니다.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마땅히 낚시질하고 밭을 갈며 내 천년(天年)을 마치겠습니다. 청컨대, 형(兄)은 번거롭게 하지 마소서.”
하였다. 뒤에 성주(星州)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이 되었는데, 7년이나 오래 되었으므로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1398년(태조 7) 8월 정도전은 이방원은 전라도로, 이방번(李芳蕃)은 동북면으로 보내야 된다고 건의하여 태조의 승인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방원은 파견을 거부하고 민무구, 민무휼 등과 함께 정도전 암살을 기도하게되는데요. (민무휼과 무휼은 다른 인물, 드라마의 무휼도 가상인물)

 결국 정도전은 1398년(태조 7) 음력 8월 26일 밤 송현에 있는 남은의 별장에서 술을 마시다가 이방원(태종)의 습격을 받게되고 그때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이방원(태종)의 사병에게 무참히 살해되죠. 태종은 정도전이 세자 이방석(芳碩)에게 당부하여 먼저 난을 일으켰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켰다고 하나 실은 태종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일으킨 변란으로 희생된 것입니다.

 이때 네 아들 가운데 정영과 정유(鄭游)는 아버지를 구하러 달려다가다 살해되고, 얼마 뒤 정담(鄭湛)은 아버지와 형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살합니다. 넷째 아들 정진은 삭탈당하여 수군으로 충군당하였고 정도전에게는 종친과 공신들을 모해(謀害)하고 왕자들을 모함하여 살해하려 했다는 죄명이 씌워져 그의 목은 참수되어 나무에 매달려져 한양의 저잣거리에 전시되는 치욕을 당하게됩니다.

  하지만 정도전의 사후에 동생 정도존과 정도복과 매부 황유정은 연좌되지 않고 계속 관직생활을 할수 있었고, 아들 정진은 세종대왕 때 형조판서에 이르렀습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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