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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장옥정, 그녀가 낳은 경종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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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 방송된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원자라고 부르는 이순(유아인 분)의 모습에 감격하는 장옥정의 모습이 방영되었습니다.

 

 이순은 옥정이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게 되자 그녀를 껴안고는 “네가 내 아들을 낳았구나. 네가 내 첫아들을 낳았어.”라며 감격에 겨워하는데요.

 

그리고는 아들을 품에 안으며 “그래. 우리 아들 얼굴 한 번 보자. 네놈이 나온다고 어미를 그리 괴롭힌 게냐. 우리 원자야.”라고 말해 옥정을 놀라게 했습니다.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 사이의 아들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원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노론의 수장이었던 송시열은 인현왕후가 아직 젊으므로 후궁의 아들을 원자로 삼는 것을 반대하다 유배되어 사사되었고 많은 서인들이 동반 축출되었으며, 결국 남인들이 정권을 장악하하게 되는데요. 이를 기사환국이라 얘기합니다.

 

  1690년, 3살에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4년 후인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어미인 장옥정은 빈으로 강등되었고 1701년 결국 어머니가 사사되는 충격을 14세의 어린나이에 감당해야하는 시련을 겪습니다.

(장희빈이 사사되기 직전 아들의 생식기를 당겨 경종이 후사가 없다는 설도 있긴합니다.)

 

  숙종은 1716년에 병신처분으로 소론을 배제하고 노론을 중용하고, 1717년에 세자가 병약하고 자식 생산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당시의 좌의정인 노론 영수 이이명에게 숙빈최씨 소생 연잉군(훗날 열조)를 후사로 정하라고 부탁합니다. 이를 정유독대라 하며 이 일로 또 한 번 노론과 소론은 크게 대립을 하죠.

 

 이런 대립 속에 숙종이 재위 46년 만에 사망하자 결국 1720년 세자(훗날 경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는데요.경종 초에는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에 노론은 경종을 압박하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장합니다. 힘없는 경종은 노론의 요구대로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게 되는데요.

 

 이에 노론은 한 술 더 떠서 경종의 병환이 심하고 후사가 없으므로 정무에서 손을 떼고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자고 주장합니다. 이 일로 또다시 노론과 소론은 치열하게 싸우게 되고 경종은 세제 대리청정을 가납했다가 다시 명을 거둬들이기를 몇 차례 반복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거처럼 노론은 경종 즉위 뒤 1년 만에 연잉군(훗날 영조)을 세제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습니다. 노론이 이 과정에서 두 차례의 태도 변화를 보임으로써 소론측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데요.

 

 소론은 노론이 숙종 말부터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도하고자 한 것이 경종 제거계획에서 나온 것으로 음모를 꾸미고 탄핵 정국을 주도하여 결국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를 신임사화라 얘기하죠.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어머니 희빈 장씨를 죽게 한 장본인인 노론을 경종은 결국 퇴출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피비린내나는 정쟁에서도 이복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과는 우애가 두터웠다 합니다. 연잉군의 등극에는 이런 경종의 배려가 결정적이었고요.

 

 신임사화 이후, 조정은 소론에 의해 휘둘렸으며, 경종은 병이 악화하여 1724년, 재위 4년2개월 만에 37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는데요. 이때 2명의 부인(단의왕후,선의왕후)에게서 자녀는 없었습니다.

 

생모의 죽음을 목격한 왕...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쟁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비운의 왕 경종은 병석에서 4년을 보내다 뚜렷한 치적 하나 남기지도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후 영조가 집권하면서 소론의 정권 독점기는 끝나게 되지만 재위 기간 내내 영조를 괴롭혔던 경종 독살설은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또 다른 비극까지 불러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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