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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장옥정, 인현왕후 그녀의 실제 삶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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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옥정, 사랑에 살다’ 인현왕후 홍수현이 결국 유아인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6월 24일 방송된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23회에서 인현(홍수현 분)은 중전복위 후 이내 숨을 거뒀습니다.

 인현은 가슴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고 이순은 뒤늦게 “과인의 탓이다. 그동안 못해준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고 자책하는데요.

 이에 인현은 이순에게 숨겨온 속마음을 드러냈으나 이순은 “중전은 조선 최고의 국모였다”고 말해 인현을 서운케 하지만, 이내 인현은 “장옥정은 여인이었고 민유중의 여식은 중전이었던 거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결코 전하를 선택하지 않을 거다”고 유언 후 눈감고 맙니다.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만 인현왕후, 그 치열한 삶을 마지막으로 조명합니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는 현종8년(1667) 민유중의 딸로 태어납니다. 그녀가 태어날 때 집안에 광채가 났다고 하며 출산 직후에 향긋한 향기가 났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녀의 큰아버지는 그녀가 아름답고 착하여 일찍 사망할 것이 염려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인 민유중은 서인이면서 노론의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었는데요. 숙종의 첫째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왕비책봉 4년 만에 천연두로 사망하자 인현왕후가 계비로 입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민씨가 궁에 들어 왔을 때 숙종은 그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김선경 분)가 궐 밖으로 쫓아낸 장옥정만을 그리워하던 터였으므로 민씨는 숙종의 환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같은 숙종의 무관심은 명성왕후가 1683년 12월 세상을 떠나자 쫓겨났던 장옥정이 궁궐로 다시 들어오면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또한, 한편에선 민씨가 잉태도 못하는 상황에서 숙종이 남인 세력인 장씨만 지나치게 총애하자 불안감을 느낀 서인세력이 새로운 후궁을 들이면서 그녀의 자존심을 송두리채 짓밟는 이중고를 겪게됩니다.

 숙종의 이 같은 행동은 물론 장옥정이라는 여인에게 마음주고 있었던것도 이유지만 한편으론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계략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얼마 후 장씨가 왕자 균(후에 경종)을 낳자 숙종의 장씨에 대한 총애는 더욱 깊어졌는데요. 급기야 숙종은 왕자 균을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내명부 정1품 희빈에 봉합니다. 이때 서인 세력은 왕비 민씨가 아직 젊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하지만, 숙종은 서인의 수장 겪인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도에 유배시키고, 서인들을 몰아내고 남인들을 등용하여 우의정, 좌의정에 임명합니다.

 그도 모자라 민씨의 투기를 이유 삼아 민씨를 폐출시키려 하자 반대에 부딪쳤으나 결국 송시열을 사사시키며 서인세력들은 사사, 삭탈관직, 유배 등을 통해 정계에서 모두 축출하는데 성공하게 되죠. 이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말하며 인현왕후는 이때 아들도 못 낳으면서 ‘투기’로 폐위된 성종 비 윤씨보다도 더 큰 죄인으로 치부되며 폐위의 수순을 밟았으며 장희빈은 정비가 됩니다.

 폐서인이 된 인현왕후는 상궁 한 명, 시녀 두어 명과 함께 안국동 본댁으로 나와 식구들을 모두 백부 집에 거쳐하게 하고 혼자서 지내게 됩니다. 이곳에서 민씨는 일절 외부와 접촉을 끊고 아래채에 기거하면서, 뚫어진 문에 창호지 한 장 바르지 않고 잡초도 그대로 두고 지내 폐옥과 다름이 없었다 전해집니다.


 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희빈 장씨의 삼각관계를 소재로 한 김만중의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입에 인현왕후의 안타까움인 전해지고 있던 시절.

 그동안 숙종은 남인세력과 장옥정일파의 전횡에 인현왕후 폐비 사건을 후회하기 시작하는데요. 이때 김춘택 등이 폐비 복위 운동을 꾀하다 발각됩니다.  민암 등 남인 일파는 이를 계기로 소론의 대두를 막으려고 했으나, 숙종은 오히려 민암, 이의징 등을 사사하고 장희빈의 오라비인 한성판윤 장희재를 제주에 원방부처하는 등 남인 일파들을 일거에 축출합니다.

이를 갑술환국(甲戌換局)이하 하는데 1694년(숙종 20년) 노론의 김춘택(金春澤, 드라마의 심운택), 소론의 한중혁(韓重爀) 등이 숙종의 폐비(廢妃)인 민씨의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남인의 민암(閔黯) 등이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화를 당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환국의 주범들의 처리에 대한 논란으로 인해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심해졌는데, 소론의 한중혁등은 유배형을 받은데 비해, 노론의 김춘택 등은 무죄방면되었기 때문인데요. 어쨌든 이후는 줄곧 서인의 세상이 됩니다.

 이 결과로 폐위되었던 민씨는 복위되고 중전이었던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고 맙니다. 이 때 다시는 빈이 후비로 오르지 못하도록 숙종은 국법으로 정하게 되어 최숙원(한승연 분)은 중전이 될 수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인현왕후 민씨는 복위된 지 7년 만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맙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장옥정이 취선당(就善堂) 근처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하였기 때문이죠.

 예의바르고 정숙하였으나 장희빈에게 매를 드는 등 단호한 면을 보이기도 했던 인현왕후. 생의 많은 시간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철저하게 외면된 채 살다 짧은 생을 마감한 그녀의 일대기는 그녀를 모셨던 궁인을 통해 '인현왕후전'이라는 한글 소설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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