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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장옥정, 사실은 정치적 희생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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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희의 출연으로 시작부터 화제가 된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이하 장옥정)가 장옥정(김태희 분)의 처참한 최후를 그리며 종영했습니다.

 

 25일 방영된 마지막회에서는 장옥정이 중전(홍수현 분)을 모욕한 죄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그려졌는데요.

 

 최숙원(한승연 분)은 장옥정이 인현왕후(홍수현 분)의 죽음을 사주했다고 음해했고 장옥정은 숙종(유아인 분)과 현치수(재희 분)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궁궐내 내명부에 벌어지는 왕의 여자들간의 치열한 암투의 결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장희빈은 정치적인 희생양에 불과했습니다.

 

장희빈을 죽음에 이르게한 정치적인 사건이 바로 갑술환국(甲戌換局)입니다.

 갑술환국(甲戌換局)은 1694년(숙종 20년) 노론의 김춘택, 소론의 한중혁(韓重爀) 등이 숙종의 폐비(廢妃)인 민씨의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남인의 민암(閔黯) 등이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화를 당한 사건입니다.

 숙종이 폐비 사건을 후회하고 있던 차 1694년 김춘택 등이 폐비 복위 운동을 꾀합니다. 민암 등 남인 일파는 이를 계기로 소론의 대두를 막으려고 했으나, 숙종은 오히려 민암, 이의징 등을 사사하고 장희빈의 오라비인 한성판윤 장희재를 제주에 원방부처하는 등 남인 일파들을 일거에 축출합니다.

 하지만, 환국의 주범들의 처리에 대한 논란으로 인해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심해졌는데, 소론의 한중혁등은 유배형을 받은데 비해, 노론의 김춘택 등은 무죄방면되었기 때문인데요. 어쨌든 이후는 줄곧 서인의 세상이 됩니다.

 이 결과로 폐위되었던 민씨는 복위되고 중전이었던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고 맙니다. 이 때 다시는 빈이 후비로 오르지 못하도록 숙종은 국법으로 정하게 되어 최숙원(한승연 분)은 중전이 될 수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인현왕후 민씨는 복위된 지 7년 만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맙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장옥정이 취선당(就善堂) 근처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하였기 때문이죠.

 인현왕후가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장씨는 다시 재기를 꿈꾸게 되지만 이 사실이 발각되어 장희빈은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함께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장희빈이 사사된 이유는 아마도 서인들의 계략이 었을 거라 판단됩니다. 인현왕후가 죽고 다시 날개를 펼치려는 것을 눈치 챈 서인들이 이를 보고 만 있지 않았겠죠.  아마도 서인들은 숙빈 최씨를 이용하여  ‘인현왕후의 죽음은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숙종에게 고하게 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들 경종의 존재감으로 겨우 목숨은 연명할 수 있었던 장옥정은 결국 마지막 날개를 채 펼치기도 전에 꿈같은 짧은 국모의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어떤오후>

* 갑술환국(甲戌換局) 이 후 장희빈 연표

숙종 20년(1694) 4월 1일 갑술환국

숙종 20년(1694) 4월 12일 폐비 인현왕후가 경복당에 입어, 장희빈은 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 희빈의 왕후 옥보가 부서지고, 장경의 부원군 교지를 불사르게 함.

숙종 20년(1694) 6월 2일 숙원 최씨가 숙의가 됨.

숙종 20년(1694) 9월 13일 숙의 최씨가 왕자(후일 영조)를 낳음.

숙종 21년(1695) 6월 8일 숙의 최씨가 귀인이 됨.

숙종 25년(1699) 10월 23일 귀인 최씨가 숙빈이 됨.

숙종 25년(1699) 12월 24일 숙빈 최씨 소생 왕자가 연잉군에 봉해짐.

숙종 27년(1701) 9월 23일 장희빈이 인현왕후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됨.

숙종 27년(1701) 9월 25일 숙종이 장희빈의 자진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림.

숙종 27년(1701) 10월 8일 숙종이 승정원에 하교하여 장희빈을 자진하게 함.

숙종 28년(1702) 1월 30일 장희빈을 양주에 장사지냄.

숙종 44년(1718) 12월 23일 장희빈의 천장지(묘를 옮길 장소)를 광주로 정함.

경종 2년(1722) 1월 10일 경종이 어머니 장희빈의 사당을 세우고 칭호를 정함.

경종 2년(1722) 10월 10일 장희빈을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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