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좌참찬 김시묵의 집에 기이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미 져버린 마당의 꽃들이 다시 피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 최고의 천사표 여인 효의왕후가 태어날 징조였던 것입니다. 먼저 어렸을 때부터 온화하고 덕스러움이 몸에 배어있던 그녀의 성품이 잘 드러나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어린시절 어느날 아이들과 같이 놀았는데, 어떤 아이가 자라나는 풀을 뽑고 있었다. 그러자 그 아이에게 책망하기를 ‘풀이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왜 뽑아 한창 자라나는 생기(生氣)를 해치느냐?’라고 하였다. 생물에 미친 사랑과 사람을 가르치는 정성이 어렸을 때부터 이와 같았으므로, 그 광경을 보고 그 소문을 들은 친척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조선왕조실록 순조21년 효의왕후 행장 中>
이런 그녀의 평판은 궁궐까지 들어가게 되어 영조 37년(1761)에 아홉 살의 나이로 세손 빈으로 간택되게 되는데 며느리를 맞은 사도세자가 그녀의 온화함에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효의왕후는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에게도 극진했는데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당시 혜빈이었던 혜경궁 홍씨와 효의왕후를 각각 사가로 내쳤으나 효의왕후는 영조에게 사가 대신 시어머니와 함께 있으며 그녀를 보필할 수 있게 해달라 간청하니 그 효심에 감탄한 영조는 내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들을 다시 궁궐로 불러옵니다. 이후에도 장헌세자(사도세자)로 인해 슬퍼하는 시어머니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궁인들조차 감동을 받았다 합니다.
정조가 왕이 되자 중전에 오른 그녀에게 후사가 없자 정순왕후의 명으로 후궁이 간택되는데 드라마에서처럼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홍국영의 누이 원빈이 후궁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즈음 대신 박재원이 양의(良醫)를 구하여 중전의 병환을 치료하고자 하자 홍국영이 크게 노하여 그를 핍박하는 등 원빈의 견제가 심하였으나 효의 왕후는 이 위기를 현명하게 대처해냅니다.
정조는 이런 효의왕후를 귀하게 여겨 아이를 갖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그의 네 번째 후궁 수빈박씨에게서 태어난 아들(후에 순조)을 효의왕후의 아들로 삼으라는 교지까지 내렸다 합니다.
정조가 승하한 후 60세가 넘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를 보필하여 칭송을 받았으며 일생을 검소하게 지내니 내명부의 모범이 아니 될 수 없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수차례에 걸쳐 존호(尊號: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올리던 칭호)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했고, 순조 20년 68세가 되자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생일잔치)을 베풀고자 했으나 이 또한 사양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순조 21년) 지병으로 창경궁의 자경전(慈慶殿)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 69세였습니다.
개혁군주 정조의 동반자로 만백성을 품에 안은 이상적인 국모로 그 소임을 완벽하게 마친 효의왕후는 그렇게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어떤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