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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대왕세종]장영실 파직사건의 전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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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과학 르네상스를 이뤄냈던 세종시대, 그 한가운데에는 기생의 아들로 천한 관비출신이었던 장영실이 있었습니다. “장영실의 아비는 고려 말 원나라 때 소주(蘇州) 항주(杭州)에서 온 중국 사람이며 어머니는 기생이다.”라고 실록에 전해지는데요.  

 동래 관비로 있던 1400년 태종이 각 지방의 관찰사들이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하여 중용을 시키고자 실시한 도천법이라는 제도를 통해 장영실은 궁궐 기술자로 대궐로 들어와 그동안 목말라했던 수많은 선진 기술들을 접하며 갈증을 해소하게 됩니다. 이러한 장영실의 능력을 알고 그의 노비신분을 벗어나게 해준 이가 바로 세종이었으며 장영실은 이런 세종과 조선을 위해 그의 모든 역량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위인전을 통해 알고 있던 사실과는 달리 장영실은 발명가이기보단 뛰어난 금속전문가였습니다. 세종과 다른 과학자들이 설계한 기구들은 장영실의 뛰어난 손재주와 금속에 대한 지식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들 수 있었으니 말이죠.

이렇게 세종과 이천 등을 중심으로 장영실의 기술력이 결합하여 조선은 자격루와 천문기기인 간의 그리고 간의를 발전시킨 혼천의 등 최고의 발명품을 보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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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3년 상의원 별좌를 거쳐 1432년 호군(護軍), 1437년에는 오늘날의 중장에 해당하는 종3품 대호군(大護軍)에 이르게 되니 세종의 장영실에 대한 총애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대호군이 된 지  5년 뒤 장영실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파직을 당하고 맙니다.

 1442년 3월, 세종의 온천행에 사용될 안여(安輿) 제작의 감독을 장영실은 같은 대호군이었던 조순생과 함께 맡는데요. 정확히 얘기하자면 안여제작은 조순생이 담당하였고 장영실은 도움을 주고 있었던 것인데 가마의 견고함을 문제 삼은 장영실의 말을 무시한 조순생의 과오로 가마는 시험운전 때 그만 무너지고 마는데요.
이 사건으로 함께 감독한 선공 직장 임효돈과 녹사 최효남, 대호군 조순생등과 함께 의금부로 끌려간 장영실은 불경죄로 곤장 1백대에서 20대가 감형된 80대를 맞고 파직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실제 책임자였던 조순생만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아 빼앗겼던 직첩을 복권시켰다하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한가지 이상한 점은 장영실이 파직 당한지 이듬해에 세종과 장영실의 역작인 천문관측대 간의대를 헐어버리라 명령을 내린 것인데요. 이점을 토대로 장영실의 파직사유를 유추해봅니다.

 앞선 포스트에서도 언급했지만, 천문학 또는 역법은 황제만이 다룰 수 있는 학문으로 명나라를 무시하고 조선만의 역법을 갖는 것 자체가 조선의 입장에선 자주의 상징이었지만 명에게는 일종의 반역이었으니 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심각한 외교문제로 비화할 수가 있었던 부분이 충분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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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즈음 조선의 이러한 움직임을 명나라가 포착한 듯 보이며 간의대를 없애려 한 것도 이 때문 있듯 합니다.

 따라서 간의대의 존재가 밝혀지면 그것을 만든 장영실의 목숨 또한 보존할 수 없었기에 그를 "안여파손사건"에 연루시켜 파직한 시킨 것은 세종이 장영실에게 베푸는 마지막 배려가 아니었을까요?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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