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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바람의 화원]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은 어떤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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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4 첫 방영되는 SBS "바람의 화원"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실존인물인 조선시대 대표적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입니다. 이정명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바람의 화원"은 원작이 팩션소설인 만큼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결합하여 이 또한 다른 사극들처럼 역사 왜곡이 우려되기도 합니다.

 드라마에 앞서 "어떤오후의 어떤사전"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시청률경쟁에 편성하여 팩션인 원작을 능가하는 역사왜곡에 시청자들의 혼선을 사전에 방지하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리 알려 드립니다.

 1745(영조 21)에 출생한 김홍도(金弘道)는 영조~정조대까지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던 조선 후기의 화가로 당대의 감식자이며 유명한 문인화가였던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이 되었습니다.

 29세가 되던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정조)의 초상을 그렸으며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활약을 했는데요.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하였다 합니다. (여기서 신한평(申漢枰)이라는 사람이 바로 신윤복의 아버지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은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이는데요.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에는 중국적인 정형 산수(定型山水)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 원체화적 경향을 나타내었으나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려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정조는 “도화서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하였으며 스승인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 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던 김홍도는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린 공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지만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합니다.


 1758(영조 34)에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는 신윤복(申潤福)은 김홍도와 같이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한 신한평(申漢枰)의 아들로 전해지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전무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신윤복의 본명은 신가권(申可權) 이며 조선중기 화가인 신말주의 7대손이란 것이 새로 알려졌지만 그림을 제외하곤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출생연도와 사망연도조차 정확치 않은 그의 일생에서 유일한 에피소드는 '점잖지 못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 는 꽤나 특이한 이력뿐입니다. 

김홍도가 서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밭갈이,추수,집짓기,대장간,서당 풍경등 주로 농촌과 서민의 생활상을 그리면서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소탈하고 익살스럽게 묘사했던 반면 신윤복은 김홍도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주로 도회지 양반의 풍류 생활과 부녀자의 풍습,그리고 남녀 간의 애정을 풍자적인 필치로 묘사했던 차이점이 있습니다.
 
 기법에서도 김홍도가 배경을 생략한 간결하고 소탈한 필치를 구사한 데 비해 신윤복은 산수를 배경으로 섬세하고 세련된 필치를 구사하는 등 극적으로 다른 화풍의 두 화가였지만 두 사람의 시선이 같았던 재미있는 사실도 있습니다. 바로 김홍도의 "빨래터"와 신윤복의 "계변가화", 김홍도의 "우물가"와 신윤복의 "정변야화"등으로 같은 인물과 풍경을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게 표현한 그림인데 아마도 원작자는 이런 두 사람의 동일한 시선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신윤복을 여성으로 만들어 김홍도와 사랑에 빠지는 팩션을 창조해낸 듯합니다. <어떤오후>

김홍도의 "빨래터"



신윤복의 "계변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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