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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대왕세종]최만리, 그는 왜 역사의 죄인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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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대왕세종"은 방영초기부터 역사왜곡의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요.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치밀한 심리묘사와 배우들의 호연으로 즐겨보는 드라마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맘에 드는 부분 중 하난가 역사에서는 그리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던 인물이 이드라마에서는 상당히 비중있는 인물로 재해석되어 등장하는 것인데요. 바로 집현전 학자 최만리(崔萬理) 입니다.


 먼저 인터넷 백과 사전에서 검색한 최만리에 관한 정보입니다.

 1419년(세종 1) 생원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집현전(集賢殿)의 정7품 박사(博士)에 임명되었다. 1427년 교리(校理)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37년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에 승진하고 1439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1444년 6조목의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한때 세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또한 환관(宦官)의 사모착용(紗帽着用)이 고제(古制)에 어긋남을 지적, 중국의 제도에 따르도록 주장하여 이를 시행하게도 했다. 조선시대의 청백리로 꼽히는 인물이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사실 최만리는 역사적으로 비난받은 사람이었던 탓에 그의 출생년도 및 그의 일생에 관한 세부적인 정보가 많이 남아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방영된 사극에서도 최만리라는 인물은 아예 등장하지 않거나 잠깐 얼굴을 보여주는 정도 였구요.

최만리에 관한 또 다른 정보는 국조방목(國朝榜目)이라는 조선 태조 초기부터 1877년(고종 14)까지의 문과(文科) 급제자를 기록한 규장각 도서에서 학인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최만리 본관은 해주로 해주 최씨의 시조이자 고려시대에 해동공자로 칭송받던 '최충'이 바로 최만리의 12대조였다 전해집니다.

앞선 최만리의 인터넷 정보에서 "환관(宦官)의 사모착용(紗帽着用)이 고제(古制)에 어긋남을 지적, 중국의 제도에 따르도록 주장하여 이를 시행하게도 했다"는 것에서처럼 그는 철저한 사대주의자로 알려졌습니다.

 최만리가 역사적으로 비난을 받게 된 동기는 아마도 한글창제에 반대했던 이력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한글학자인 김윤경(1894 ~ 1969)의 저서를 통해서인데요. 김윤경은 그의 저서  "조선 문자 및 어학사" 에서 최만리를 "한글 창제를 반대한 저능아의 발광"이라고 혹평했고 바로 이러한 김윤경의 평가가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졌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앞선 포스트에서 한글창제를 정창손과 함께 반대한 인물이 최만리이며 그는 세종에게 한글창제를 반대하는 이유 6가지를 상소를 올린것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 최만리 언문 창제 반대 상소문 요약

첫째, 대대로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섬기며 사는 처지에 한자와는 이질적인 소리 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한자와 다른 글자를 가진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티베트) 등은 하나 같이 오랑캐들뿐이니,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일이다. 

  셋째, 새 글자는 이두보다도 더 비속하고 그저 쉽기만 한 것이라 어려운 한자로 된 중국의 높은 학문과 멀어 지게 만들어 우리네 문화수준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넷째, 송사에 억울한 경우가 생기는 것은 한자를 잘 알고 쓰는 중국사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며, 한자나 이두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관리의 자질에 따른 것이니 새 글자를 만들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섯째,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인만큼, 온 국민과 선조와 중국에 묻고 훗날 고침이 없도록 심사 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한데, 그런 신중함이 전혀 없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으로 졸속하게 추진하고 있고, 상감은 몸을 헤쳐 가며 지나친 정성을 쏟고 있다. 

  여섯째, 학문과 수도에 정진해야 할 동궁(문종)이 인격 성장과 무관한 글자 만들기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출처 : 네이버 지식in>

 위 글에서처럼 최만리는 지극히 사대부적인 시각에서 한글창제에 대한 우려를 표현했으며 이는 당시 시대상황에 비추어 볼 때는 그 강도가 그리 심한 것은 아니었으며 다섯째, 여섯째 항처럼 최만리는 한글창제 때문에 세종과 세자의 건강이 악화할까 우려를 표하기도 합니다.

 이 상소문은 상당한 파장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상소를 올린 최만리와 신석조,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은 의금부에 갇혀 있다 이튿날 석방되었으며 정창손은 파직을 당하게 되는데 이것은 반대상소의 주동자가 최만리가 아닌 정창손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위의 상소가 한글창제를 반대한 상소가 아닌 한글창제 1년 뒤에 한자음에 언문으로 중국식 발음으로 토를 다는 작업 운회언해(韻會諺解)에 대한 반대상소였지만 앞서 언급한 한글학자인 김윤경의 확대해석으로 이들은 지금까지도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떤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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