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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바람의 나라]왕이 된 무휼의 주요 전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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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신동으로 불릴 만큼 총명함을 드러내던 무휼은 불과 10세 되던 해에 고구려를 침략한 부여군을 방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무휼은 적을 산골 깊숙히 끌어들여 골짜기에 적을 가두고 기습전을 펼쳐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합니다.


 이듬해 11세 되던 해에는 태자에 책봉되어 유리왕를 대신해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으니 무휼의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왕재임엔 분명했던거 같습니다.

 
 4년 뒤인 서기 18년 10월에 무휼은 유리왕의 뒤를 이어 15세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되는데요. 이때부터 고구려의 과감한 팽창정책이 시작됩니다.


대무신왕(무휼)이 전공을 세운 대표적 사례를 몇가지 소개합니다.



☞ 대소왕을 죽였으나 전쟁에는 패한 동부여와의 전쟁

 서기 20년 10월, 부여의 대소왕은 대무신왕에게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사신을 통해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전하며 선전포고를 하였는데요.

 이에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으로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도다.”라며 까마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대소왕에게 전하니 대소왕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놀랬다 합니다.
 
 서기 21년 12월 대무신왕은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22년 2월 고구려의 장수인 괴유(怪由)가 대소왕을 죽였으나 대무신왕의 자만심 때문에 공격을 무리하게 감행하다 부여군에게 포위 당한 끝에 후퇴하고 맙니다. 대소왕을 죽이는데 성공하였으나 전쟁에서는 패하고 만 것이죠. 

대소가 죽은 후 대소의 동생인 갈사왕은 갈사국를 세웠으나 대소의 사촌 동생이 백성 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귀순하는 등 동부여는 큰 혼란에 빠지지만,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광개토태왕때 굴복당하게 된 이후 494년(고구려 문자명왕 3)에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합병되었으며 이후로 부여의 모습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 잉어를 사용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승리한 한나라와의 전쟁

 28년 7월에 한(漢)나라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습니다. 이에 고구려군은 을두지의 진언을 따라 위나암성에서 수십 일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漢)군이 포위를 풀지 않자 을두지가 계책을 내기를 위나암성이 암석의 땅으로 물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니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술과 함께 적장에게 보내도록 하였는데요.
 
 을두지의 의견에 따라 대무신제는 수초로 싼 잉어와 술고 함께 한나라둔의 위신을 세워주는 내용을 담은 편지도 함께 보냈습니다. 이에 한나라의 요동 태수는 성안에 물이 있어 이른 시일 안에 성을 점령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스스로 물러갔으니 고구려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물리친 것입니다.



☞ 호동와자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 낙랑국(樂浪國) 정벌

 대무신왕은 32년에 낙랑국을 공격하여 정복하는데요. 낙랑국 정벌에 앞서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왕 최리(崔理)와 만나 그의 사위가 됩니다.

 낙랑에서 그곳의 공주와 혼인하고 돌아온 호동은 아내 최씨녀(崔氏女)에게 "그대의 나라 무구(武庫)에 들어가 고각(鼓角-북과 나팔)을 몰래 찢어버린다면 내가 그대를 아내로서 맞아들이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부부가 될 수 없으리라." 며 아내를 종용하였습니다. 이에 낙랑공주는 몰래 무고에 들어가 예리한 칼로 그 고각을 찢어 버리고 호동이게 그 사실을 알렸으며 호동은 그 말을 듣고 왕에게 고하여 낙랑을 공격했습니다. 낙랑의 왕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있다가 고구려군이 성 밑에 이르러서야 깜짝 놀라 무고에 가보니 벌써 고각은 부서져 있었으며 그 사실을 안 최리는 마침내 딸을 죽이고 항복하고 말았는데요.

 이 후에 호동이 태자가 되는 것을 시기한 원비(元妃)의 모략와 자신이 죽게 만든 낙랑공주에 대한 사랑의 번민으로 그만 자살하고 맙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낙랑 복속은 동한의 반발에 부딪히는데요. 동한은 낙랑 지역이 원해 자신들의 땅이라며돌려줄 것을 주장한하지만 고구려가 이에 응하지 않자 동한의 유수는 서기 44년에 바다를 통해 낙랑 지역에 병력을 투입하였고 이에 밀린 고구려는 결국 낙랑을 동한에 뺏기게 됩니다. <어떤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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