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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바람의나라]무휼(대무신왕), 그 치열했던 일대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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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왕의 세째 아들인 무휼은 어릴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라 6세의 어린나이에 이미 부여의 사신이 유리왕을 꾸짓는 것을 보고 그 시시비비를 가릴 줄 알았다합니다. 이같은 총명함에 무휼은 15세의 어린나이에 고구려 제 3대왕에 등극하게 되는데요.  



우리나라 역시를 통틀어 신왕(神王)이란 호칭을 얻은 유일한 군주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일대기를 소개합니다.

14년(유리왕 33) 11세로 태자(太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음
 
18년 유리왕이 죽은 뒤 고구려 제 3대 황제가 됨 (15세) 

21년 12월  부여 선제공격.

22년 2월 괴유 장군이 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帶素王)을 죽임.
(하지만 자만심으로 인한 무리한 진격으로 전쟁에서는 패함)
 - 대소왕의 막내 동생은 부여를 빠져나와 갈사국(曷思國)을 건국.

23년 유연. 유수 형제 신의 왕망 제거

25년 유수 후한의 왕으로 등극(광무제)

26년 10월 개마국(蓋馬國)을 병합하여 국토를 살수(薩水) 이북까지 확대
 - 고구려 최초로 한반도 진출계기
 - 12월 구다국 복속

27년 고구려, 낙랑국 정복

28년 7월 한(漢)나라의 요동 태수(遼東太守)가 100만 대군으로 위나암성 침략 함 
  - 을두지(乙豆智) 지략(智略-잉어계책) 으로 한나라 물러남

32년 4월 둘째아들 호동(好童王子)의 지략으로 한사군(漢四郡) 중에서 아직 남아 있는
낙랑군(樂浪郡)을 정벌하지만 원비인 왕비의 간통 누명과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결.

37년 낙랑군(樂浪郡)을 재차 공략(攻略) 낙랑을 다시 복속하지만 후한의 반발 봉착함

44년 후한 유수가 낙랑에 병력투입. 고구려 낙랑을 빼앗김.

44년 10월 41세이 나이로 사망.

 대무신왕의 위와 같은 업적은 이 후 고구려의 성장에 큰 힘이 되었으며 정복 전쟁외에 대내적으로는 을두지·송옥구 등 많은 인물을 등용하고, 처음으로 좌·우보체제(左右輔體制)를 설치, 확립시켜 이들로 하여금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함으로써 고구려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 형성을 위한 첫 단계를 만들었습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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