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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천추태후]강감찬,강조와의 운명적 만남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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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4일 방영된 KBS대하사극 "천추태후" 2회에서 황보수(천추태후)는 거란에 밀려 고려로 넘어온 발해 유민들의 폭동에 휘말려 이 와중에 강조(최재성 분)와 강참찬(이덕화 분)을 만나는 장면이 연출되었는데요. 이 때문에 결국 체포되어 경종의 앞으로 세 사람은 끌려가기까지 합니다.

과연 고려역사상 실존했던 이 세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실제 역사에서도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은 948년 태조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운 삼한벽산공신 궁진의 아들로 태어나 36세 되던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습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많은 신하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으며, 1018년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찌른 후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여 역사상 길이 남을 귀주대첩의 주인공이 됩니다.

 한편, 황보수(천추태후)는 964년에 태조의 아들인 대종과 선의태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드라마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부모의 성인 왕씨(王氏)나 유씨(柳氏)가 아니라, 할머니인 태조비 신정왕태후 황보씨(神靜王后 皇甫氏:반효정 분)의 성을 따랐습니다.

 16세 되던 980년에 동생과 함께 사촌이던 경종의 비가 된 후 헌애왕후로 불립니다. 경종이 981년에 경종이 죽자 아직 2살이던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아들(후에 목종) 대신 왕후의 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후는 태후가 되어 천추궁(千秋宮)에 머물게 됩니다.

 강감찬이 문과에 급제한 건 983년으로 천추태후가 16세의 나이로 왕후가 되던 980년에는 세상을 떠돌며 견문을 넓히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강감찬이 17세되던 964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장길을 찾아가 양아들이 된 후 10년간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전해짐)

따라서 천추태후가 경종과 혼인하기 전 강감찬과 만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 강조

 강조 장군은 목종을 폐위하고 주살하였다 하여 역적으로 치부되고 있는 인물이지만 당시 상황을 미루어 보건데 어느 정도의 당위성이 있었고 후에 요나라의 침략에 선봉장으로 나서 거란과 전쟁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다 결국 포로로 잡혀 그들의 회유에 굽히지 않고 당당히 죽음을 선택하는 인물입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드라마에서 가장 왜곡이 심한 인물이 강조입니다. 강조는 황해도 신천지방의 호족인 신천강씨(信川 康氏)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고려태조 왕건의 22번째 부인인 신주원부인(信州 =信川의 옛이름)의 집안 동생으로 오늘날 편안할 강자를 성씨로 쓰고 있는 국내/외 거주 모든 사람은 크게 분류하면 모두 신천강씨의 자손(곡산, 재령, 제주,충주 등 모두 포함)들입니다. 따라서 발해유민이라는 설정은 극적인 전개를 위해 만들어낸 작가의 상상력일 뿐입니다.

 강조 장군의 집안은 천추태후의 행실과 목종의 지도자적 능력에 불만을 품고 이들을 몰아내고 대량원군(大良院君 후의 현종)을 추대하는 인물로 드라마에서처럼 천추태후를 나중에 혼자 흠모하는 사람이며 천추태후가 어린시절 발해유민의 폭동에 휘말려 이 와중에 황보수(천추태후)를 만나는 것 또한 허구입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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