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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천추태후, 거란의 1차 침입과 서희의 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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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방영된 KBS 대하사극 '천추태후'에서는 성종 대에 처음 발발한 '거란의 제1차 침입'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유명한 '거란의 제1차 침입'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고려 초로 거슬러 올라가 야합니다. 926년,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은 중원에 진출하기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고자 이른바 동진 정책을 폈는데요. 이러한 거란에 송나라에 우호적이면서 건국 초부터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며 북진정책을 진행하고 있었던 고려는 후방의 위협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거란은 후방의 위협이 되던 고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태조 왕건에게 사신에게 낙타 50필을 바치게 하였으나 왕건은 낙타를 만부교 밑에 매어 굶겨 죽이고,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을 보내며 그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맙니다. 이로 말미암아 두 나라의 외교는 단절되었으며 고려는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를 하였습니다.

 이에 거란은 984년과 985년 두 번에 걸쳐 요동의 여진을 정벌하며, 985년에는 동시에 정안국도 멸망시키고 압록강 하구의 여진도 몰아냈으며 국경을 압록강까지 확장시켰습니다. 결국, 고려와 거란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게 되었는데요. 거란에 있어 고려는 중원진출을 위해 반드시 제압 해야 할 강한 위협이었고 고려에 거란은 국가의 안보에서 가장 강하고 직접적인 위험세력이 된 것이죠. 

 드라마에서처럼 천추태후 밑으로 들어간 김치양의 수하(여진족)에 의해서 거란의 움직임이 알려 진 게 아니니구요. 993년(성종 12년) 5월 서북계의 여진이 고려 조정에 거란의 고려 침략 모의를 보고 했지만 당시 고려 조정은 여진을 의심하며 믿지 않았고, 8월 이후 거란의 군사가 국경에 이르렀음을 알고서 뒤늦게 고려는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합니다.


 
 10월 고려에서는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로,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로, 문하시량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북계에서 거란을 막도록 했고, 윤달에 거란의 소손녕이 봉산군을 쳐서 고려 선봉군사 급사중 윤서안 등을 잡았고, 이에 서희가 봉산군을 구원하려 하자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은 자신들의 고구려 계승을 주장하며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으니 정토한다며 고려 조정에 항복을 강요하는데요. 이것을 본 서희는 돌아와서 고려 조정에 화친이 가능하다 보고했고, 고려 조정에선 감찰사헌 이몽진을 예빈소경으로 차함하여 화친을 청했으니 소손녕은 대동강에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이끌고온 80만 대군으로 진격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실제로는 6만 안팎이었다 전해집니다.) 

 이몽진이 별다른 성과없이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크게 2가지로 의견이 나뉘었는데 하나는 임금이 중신들과 함께 항복을 해야한다는 항복론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거란에게 넘기고 국경을 황주부터 절령까지로 조정하자는 할지론이었는데요.

 성종은 할지론을 택하여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남은 쌀을 적이 활용하지 못하게 대동강에 버리도록 합니다. 하지만, 서희의 생각은 달랐는데요. 서희는 식량을 중요성을 성종에게 설명한 후 쌀을 버리는 행위를 중지하게 하였고 거란의 목적이 가주와 송성을 빼앗는 데 있을 뿐임을 지적하고 이번에 고려의 영토를 내어주면 앞으로 계속 그러해야 한다며 할지론의 위험을 알립니다. 

 이처럼 고려 조정에서 의견 대립이 되는 동안 기다리다 못한 소손녕은 안융진을 먼저 공격합니다. 하지만,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에게 패배했고 이후 소손녕은 더는 공격을 감행하지 못한 채 항복만을 재촉합니다. 이를 안 성종이 다시 한 번 화통사(和通使)로 합문사 장영을 보내자 소손녕은 '다시 대신을 군문 앞에 보내 면대'하자고 하였고 이때 거란의 진영에 갈 신하를 찾자 서희 한 사람만 나섰다 합니다.
 
 성종은 몸소 강가까지 나가 전송하며 손을 잡고 위로해 보냈고 서희가 국서를 받들고 거란의 진영에 가서 소손녕을 대면했으니 이것이 유명한 서희의 외교 담판입니다.

 여기서 소손녕은 고려를 침략한 이유로 첫째, 고려가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자기 땅인 고구려를 침식하고 있으며 둘째, 이웃인 거란을 버리고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서희는 첫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고 했으므로 요의 동경(東京)도 고려의 땅이며 둘째, 압록강 유역도 고려 땅인데 고려가 요와 교류하고자 해도 여진이 있어 불가능하므로 이 지역을 회복하여 성을 쌓고 도로를 확보하면 교류할 수 있다고 대응하였는데요.

 서희의 주장은 거란 측에 인정을 받고, 양국은 압록강을 경계로 양쪽에 각자 성을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하기로 하고서 소손녕이 거란 황제에게 알리고 전쟁을 중지하게 되었다. 또한, 서희의 7일간에 걸친 외교 담판으로 고려는 압록강 동쪽 280리를 개척하는 데 동의를 얻었고, 송나라의 연호 대신 요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압록강 동쪽 280리 땅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원래 그 땅은 거란의 것이 아닌 여진이 점령하고 있는 땅이었기에 고려는 다시 여진을 축출하고자 또 한 번 전쟁을 해야만 했는데요. 바로 서희가 나서서 성종 13년인 994년 정흥진, 귀화잔, 곽주, 귀주에서 다음해엔 안의진, 흥화진에서 여진을 쫒고 성을 쌓은 강동 6주입니다.


 
  강동 6주를 손에 넣어 개국 후 처음으로 국경이 압록강에 닿은 고려였지만 안타깝게도 보주는 거란의 땅이었는데요.(보주는 압록강의 하류에 있어서 유일하게 압록강을 건널 수 있는 곳입니다.) 거란은 보주에 내원성을 쌓아 고려 침략에 계속 이용하여 고려를 힘들게 하였으며 거란이 멸망할 때까지 보주는 거란의 것이었습니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은 이렇게 끝나지만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않다가 결국 두 번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다시 받게 되어 고려는 또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됩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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