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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첨성대는 덕만공주가 아닌 선덕여왕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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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일 방송된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덕만이 월천대사를 궁으로 불러들여 천문 관측대인 ‘첨성대’를 지어 천체를 살피는 격물을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이 방영되었습니다.

 미실이 독점했던 신당과 이런 백성의 무지를 이용해 불안을 조장하거나 사익을 채우는 것을 경계하기위한 덕만공주의 첫번재 책무라고 밝힌 첨성대는 월천대사가 건립의 수장이 되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죠.

 과연 첨성대는 진평왕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대, 다시 말해 덕만이 공주로 있던 시절에 제작된 것일까요?

먼저 첨성대에 관해 알아봅니다.

국보 제31호. 높이 약 950㎝.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천문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첨성대의 구조는 기단부(基壇部)·원주부(圓柱部)·정자형두부(井字形頭部)로 나누어진다.

 기단부는 사각형 모양으로 상하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상단은 한 변이 518㎝, 높이 39.5㎝인 직육면체 석재 12개로 이루어져 있다. 하단은 이보다 약간 큰 한 변이 536㎝, 높이가 39.5㎝인 직육면체 석재 20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단의 방향은 남쪽 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 돌아가 있다.

 원주부는 총 27단으로 높이는 805㎝에 이르며 술병 모양을 하고 있다. 제일 아랫단의 둘레는 1,600㎝, 14번째 단의 둘레는 1,170㎝, 제일 윗단의 둘레는 920㎝이다. 아래부터 제12단까지는 각 단의 높이가 약 30㎝이다. 중앙의 출입구는 제13~15단에 걸쳐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약 95㎝이다. 출입구의 방향은 정남쪽에서 동쪽으로 16° 돌아가 있다.

 출입구 아랫변의 돌은 커다란 평판석(平板石)으로 되어 있으며 13단 이상은 내부가 비어 있다. 그리고 평판석에는 사다리를 걸쳤다고 생각되는 홈이 출입구 양 끝에 파져 있다. 13~27단까지 비어 있으므로 관측자가 사다리를 설치하고 아래위로 오르내렸을 것이다. 
 
 정자형의 두부는 상하 2단의 정자형 구조로 각 단은 306×32×32㎝ 크기의 석재를 4개씩 정자형으로 물려놓았다. 정자석의 내부에 220×64㎝의 공간이 확보되므로 하부에 나무판을 깔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첨성대 전체의 석재는 화강암으로 총석재수는 365개 내외이고, 기단부, 원주부의 외벽과 정자형 두부는 다듬어져 있으나 내벽은 잘 다듬어져 있지 않다. <다음 백과사전 中>

 
 첨성대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조(善德王知幾三事條)'의 끝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짧게 나오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에 좀 더 자세하게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첨성대는 경주부의 남쪽 월남성에 있는데, 당태종(唐太宗) 정관(貞觀) 7년 계사년(癸巳年: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5척, 위의 둘레가 21.6척, 아래 둘레가 35.7척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해서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첨성대조>

 
 이를 근거로 선덕여왕의 재위기간이 632년~647년이니 첨성대는 덕만이 여왕이 되기 전인 덕만공주 시절이에 건립된게 아니라 선덕여왕 시절에 만든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첨성대는 천문 관측을 위해 지어졌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나, 수미산 또는 우주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라는 주장도 있는데요. 이는 첨성대의 모양이 불교에서 말하는 상상의 산인 수미산(須彌山)을 그대로 빼어 닮았고 당시 융성했던 불교를 나타내기 위한 거대한 상징물 제작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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