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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추노'의 배경이 된 소현세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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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새 수목드라마 '추노'의 인기가 회를 거듭할 수록 상승하고 있는 가운데 조선 최고의 무장으로 있다 노비로 전락한 송태하(오지호 분)의 과거에 대해 시청자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송태하(오지호 분)는 조선 최고의 무사를 길러내는 훈련원 교관 시절, 병자호란을 맞아 가족을 잃고 끝까지 항전을 불사하지만 인조가 항복을 하며 전쟁이 끝난다.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청나라 대장군 용골대와 수장승부를 겨루지만 승부를 내지 못하고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로 향한다.

이후 8년간 소현세자와 함께 지내며 그의 원대한 꿈을 함께 이룰 것을 결의한다.귀국 후, 소현이 급작스럽게 죽고 뒤이어 몰아친 숙청 광풍에 누명을 쓰고 참형 직전에 노비로 떨어진다. <KBS '추노중'>

위에서 처럼 송태하가 노비로 전락한 배경에 소현세자의 죽음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요.
다시 말해 '추노'는 소현세자 독살이란 음모론을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이죠.



소현세자, 그의 죽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먼저 KBS '추노'에서 언급한 드라마 배경을 알아봅니다.
청의 20만 대군 앞에 조선은 열흘만에 치욕스런 항복을 하게 되고, 소현세자를 비롯한 60만의 백성이 노예가 되어 청으로 끌려갔다.
8년 후, 볼모 생활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온 소현세자는 인조와 정치적 갈등을 빚던 끝에 의문의 병을 얻어 숨을 거둔다. 독살로 의심되던 소현세자의 급사는 정치세력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으로 이어졌다.

이같은 혼란 속에 차별과 학대를 피해 도망하는 노비들이 속출하였고, 이들을 추격하는 현상금 사냥꾼들 또한 성행하였으니, 이들을 추노꾼이라고 불렀다.

 인조에게는 네 명의 적자와 두 명의 서자가 있었는데 장남이 소현세자, 차남이 봉림대군(후에 효종), 삼남은 인평대군(인평대군의 7세손이 흥선대원군), 막내는 용평대군이었습니다.

 이 당시 중국은 후금으로 불리던 당시의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정묘조약을 통해 맺은 형제 관계를 폐지하고 군신 관계를 맺은 후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하라 강요하지만 인조가 이것을 거부하자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마는데요.

 이에 조선은 남한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항쟁했지만 12만 대군에게 무참히 패하여 불과 45일 만에 항복하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이른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됩니다.  또한 이 "삼전도의 굴욕"에서 맺은 불평등 조약에 따라 그의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과 함께 청에 볼모로 붙잡혀 가게 됩니다.

 이후 소현세자는 심양(瀋陽)의 심관(瀋館)에 9년간 머무르면서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두 국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청의 많은 고위 관리들과 친분을 쌓으며, 조선인 포로 도망자들의 송환문제, 청의 조선에 대한 병력, 군량, 선박요구, 각종 물화의 무역요구 등 정치와 경제적 현안을 맡아 차분히 처리하였으며, 또 조선의 평화를 위해 수치를 감수하며 청의 인사들이 벌인 대부분의 행사에도 참여하고 청나라 황제의 사냥 등에도 동행하였다 합니다.

 당시 인조는 삼전도에서 당한 굴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반청의 색깔을 더욱 짙게 드러내는 반면 어리석게도 망해가고 있던 명나라에 조선의 국운을 의탁하던 처지였으므로 소현 세자의 이같은 행보는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에게는 세자가 청을 뒤에 업고 자신을 밀어내려는 찬탈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소현세자는 볼모로 잡혀온 지 7 년 만에 명의 마지막 잔당을 토벌하러 북경으로 출진하는 청의 9 대왕 다이곤을 따라가 명이 멸망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고 북경에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과 교류하면서 서양의 기독교와 과학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조선에 가지고 왔으나 이마저 친청 행위로 비쳐서 인조와 대신들에게 많은 비판을 사게 됩니다.

 또한,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의 이간질이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미움을 사게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되어 볼모생활을 끝내고 9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불과 2달 만에 갑자기 병으로 누웠고, 이후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마는데요.


그의 죽음에 대해 인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 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바깥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인조)도 알지 못하였다.당시 종실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는 인렬왕후의 서제였기 때문에, 세완이 내척으로 세자의 엽습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을 수 밖에 없는데요. 당시의 배청적(排淸的)인 분위기와 소현세자를 상당히 못마땅해하는 인조의 감정 등을 염두에 두면 가능성이 있다 보입니다. 이것은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인조의 사건처리를 봐서도 짐작할 수 있는데요.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임금 , 왕후 , 세자 , 세자빈등이 죽으면 안위를 담당하던 내의원의 의관들은 반드시 파면이나 사사를 시킵니다. 하지만, 인조는 소현세자의 사인을 조사하기는커녕 당시 의관이었던 이형익을 처벌하지도 않고 급하게 장사를 치러버리는데요. 장례절차 또한 박대에 가깝게 아주 소홀히 하기에 삼사에서 부당하다고 간하였으나 인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소현세자의 아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종법을 무시하고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웠고 소현세자의 빈 강씨를 사사하고 어린 손자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병으로 죽게 만드니 "삼전도의 치욕" 후 피폐해진 인조의 자존심이 과연 장자의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었나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 

<참고자료 : 인터넷 백과사전,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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