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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동이]인현왕후 폐위, 드라마와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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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일 오후 방송된 MBC 월화 드라마 '동이'에서 숙종(지진희)의 오해로 인현왕후가 폐비 되는 과정이 방송되었습니다.

 장희빈 측의 계략으로 대비가 병을 얻고 급기야 사망하자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인현왕후가 있다 오해한 숙종(지진희 분)의 명으로 인현왕후는 폐서인(廢庶人)되어 궁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 인현왕후의 폐위는 대비의 사망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앞선 포스트에서 언급했듯이 드라마 상 대비의 사망시기는 너무 늦은 감이 있습니다. 장옥정이 대비 때문에 궁에서 쫓겨나고 대비가 죽고 나서야 다시 숙종의 품에 안겼으며 얼마 후 숙원에 봉해지고 아들 균(훗날 경종)을 낳게 되죠.

 바로 인현왕후는 붕당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숙종과 장옥정의 자식 균(훗날 경종)의 원자 책봉이 원인이 되어 폐서인되었으며 이 때 수 많은 피바람이 같이 불었으니 1689년에 발생한 이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말합니다.

  숙종 6년 이른바 허견의 역모사건으로 경신환국이 발생하고 이때 몰락했던 남인세력은 이 후 장희빈을 내세워 조금씩 세력을 얻어가기 시작합니다.

 한편, 인현왕후는 서인인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그녀가 왕자를 낳지 못한 가운데 1688년에 장옥정이 아들 균을 낳자, 숙종은 균을 원자로 삼아 명호(名號)를 정하고 당시 소의(昭儀)였던 장씨를 희빈으로 봉하려고 합니다.

 이때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한 서인측은 중전이 아직 젊은데 후궁 소생을 낳은 지 두 달 만에 원자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했지만, 숙종은 1689년 5월에 이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를 정하여 종묘사직에 고하고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삼죠.

 이에 서인 측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이 2번이나 상소하며 '송나라의 신종(神宗)이 28세에 철종(哲宗)을 얻었으나 후궁의 소생이라 하여 번왕(藩王)에 책봉했다가 적자가 없이 죽자 그때야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했다'는 예를 들면서 다시 반대합니다.

 이에 숙종은 분노하게 되고 이때를 틈타 남인계인 승지 이현기, 윤빈 등이 상소하여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게 됩니다.  숙종은 이들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직을 삭탈하여 제주도로 유배하고,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으며 그밖에 송시열의 주장을 따른 많은 서인측 인사를 파직 또는 유배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서인세력은 다시 몰락하게 되고 득세한 남인은 서인의 죄를 계속 추궁하게 되는데요. 결국, 송시열은 제주도에서 정읍으로 유배지를 옮기던 중 사약을 받았고, 김만중(金萬重)·김익훈(金益勳)·김석주(金錫胄) 등은 보사공신(保社功臣)의 호를 삭탈 당하거나 유배당하고 맙니다.

 이도 모자라 숙종은 이모든 문제가 중전인 민씨(인현왕후)가 원자책봉에 불만을 품어 발생한 것이라며 중전을 폐비하려고 합니다. 이에 재야의 서인이던 오두인(吳斗寅) 등 86명이 이를 저지하려고 상소하지만, 숙종은 상소의 주동자인 전 응교 박태보(朴泰輔), 전 참판 이세화(李世華), 오두인 등을 밤낮으로 신문한 뒤 유배시킵니다.

 결국, 숙종은 이듬해(숙종 16) 5월 2일 중전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6월에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한 뒤 10월에 희빈장씨를 왕비로 책립(冊立)하게 됩니다.

 일개 궁인에서 왕비가 된 장옥정의 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피바람을 등에 지고 폐서인되어 훗날을 기약 없이 보내게 되는 인현왕후의 눈물은 언제 그칠 줄 모르게 됩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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