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보위에 오르기 전 세손 시절엔 익위사(翊衛司)란 조직이 세손의 안위를 살폈는데 드라마에선 이 익위사의 관원들이 정조가 왕이 된 후 홍국영의 건의로 설치된 숙위소에 고스란히 합류하게 되죠. 영조시대에는 세손을 지키는 익위사외에 영조를 호위하는 군사조직이 별도로 있었으니 바로 용호영(龍虎營)입니다.
☞ 용호영 (龍虎營)
전신이었던 금군은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의 소위 3위가 있었는데, 효종 3년에 내삼청을 설치하고 금군을 맡아 지휘하게 하였다가 영조 31년(1755)에 용호영(龍虎營)으로 개명되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영조가 승하한 후 정조가 보위에 오르는데 내금위장의 역할이 컸었는데 이때는 이미 내금위가 용호영으로 바뀌었으니 조금 이상하네요. 아무튼, 용호영은 병조판서가 책임자로 있었으며 인원은 1,000명이 넘을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익위사(翊衛司)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말합니다. 태종(이방원) 35년 당시 세자의 경호대를 익위사로 확대강화 한 것이며 이때는 공신 또는 재상의 자제들로 편성이 되어 있었으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태종의 피나는 왕권강화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또한, 익위사 관원의 수는 처음 16명에서 세종 때 14명으로 소수 정예부대의 양상을 띄는데 드라마에서 수십 명으로 표현되는 부분과는 사뭇 다르며 박대수 및 익위사 3인방의 출신성분 또한 역사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네요.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 갑니다.
☞ 숙위소(宿衛所)
정조가 보위에 오른 후 도승지가 된 홍국영은 홍인한, 정후겸, 홍계희, 김귀주 등의 반대세력을 제거하는데 얼마후 정조 1년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홍계희의 손자인 홍상범의 주도로 정조를 암살하려 한 사상초유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를 계기로 홍국영의 건의가 받아들여 저 숙위소(宿衛所:한자 그대로 풀면 숙직을 하며 지키는)가 만들이지는데 숙위대장은 드라마에서처럼 홍국영이 도승지와 겸직하게 됩니다. 왕의 안위를 핑계 삼아 궁궐의 모든 문서를 숙위소를 통해야만 왕에게 올리는 등 홍국영은 궁궐 안에 머물면서 숙위군사를 직접 통제하며 막강한 권력(월권)을 행사하는데요. 숙위소(宿衛所)는 결국 홍국영이 파직당한 후 폐지되고 맙니다.
그야말로 숙위소는 정조의 군대가 아닌 홍국영의 군대였던 것입니다.
☞ 장용영(壯勇營)
정조는 홍국영의 군대였던 숙위소를 폐지한 후 새로운 체제에 따라 조직, 개편한 자신을 위한 호위군대를 만드는데 바로 장용위(壯勇衛)였습니다. 정조 9년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올리는 조치를 취하고 이를 기념하는 과거시험을 보았는데 이때 무과에서 뽑은 2,000명 가운데 우수한 자를 국왕 호위의 금군으로 흡수하였습니다. 이를 토대로 2년 후에는 500명 규모의 장용위라는 새로운 금군을 조직하고, 점차 인원을 늘려 장헌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는 문제와 관련하여 장용위를 군영으로 확대하여 정조 17년 장용영(壯勇營)을 만들게 됩니다.
장용영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나누어지는데,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하였고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외영제는 수원부를 화성으로 개칭하고 정3품의 부사(육군 소장급)에서 정2품의 유수(장관급)로 승격, 장용외사와 행궁정리부의 직을 겸하게 하였으며, 그 아래에 판관1인을 두었습니다. 지휘관인 장용영변방은 장용사(壯勇使) 또는 장용대장으로 개칭하였으며, 그 규모는 12,000여 명이나 되었으며 이 중 5,000명을 수원 화성에 주둔시켰습니다.
외영의 편제는 정조 22년에 크게 개혁되어 중앙집권적인 오위체제를 도입, 강력한 왕권의 상징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정조가 승하한 후 다음 보위에 오른 순조에 의해 혁파되고 맙니다.
이로써 노론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시켜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개혁의 급물살 속에 자신을 안위를 지키고자 만든 그의 친위부대 장용영(壯勇營)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어떤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