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 조영규는 그렇게 죽지 않았다.

 7일 방송된 SBS ‘육룡이나르샤’에서 이방원의 심복인 조영규가 척사광 칼에 맞아 사망하는 장면이 방송되었습니다.


 조영규는 반촌에 몰래 만들어 둔 이방원 무기 창고에 아이가 들어오자 죽여야 하는지를 놓고 갈등하다 척사광과 만나게 되고  아이는 조영규 손에 조영규는 척사광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데요.




 조영규는 고려 말·조선 초의 무신으로 수차에 걸쳐 왜구 토벌전에 참전하고 이성계가 세력을 구축하는 데 신진세력의 무장으로 크게 활약했던 실존인물입니다.


 조영규는 오늘날 신창조씨(新昌趙氏)의 시조이나  조상의 가계가 불분명하고 자나 호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반 평민 출신으로 추측이됩니다.


 그의 아내는 고려 말의 명문족의 하나인 연안차씨 차견질의 첩녀로 차견질의 형인 차원부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후에 하륜에 의해 살해됩니다.


 드라마에서 처럼 이성계의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으나 조영규 혼자 벌인일이 아니라 이방원의 지시를 받거 조영무,고려등과 함께 벌인 일입니다.


 이해에 정도전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기도 하는데요.



 드라마에서는 조영규의 죽음을 계기로 이방원이 왕자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듯 보이지만 왕자의 난은 1398년(태조 7) 8월에 일어난 일이며, 조영규는 1395(태조 4) 1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7일 방송된 조영규의 죽음은 극적인 구성일 뿐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예조 전서 조영규의 졸기>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1월 9일 갑진 2번째기사 


예조 전서(禮曹典書) 조영규(趙英珪)가 졸(卒)하였다. 영규의 처음 이름은 조평(趙評)이었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따라다니며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웠고, 개국(開國)하자 〈개국〉 공신에 참예하였다. 이에 이르러 병으로 졸(卒)하니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증직(增職)하고 후하게 부의(賻儀)하였다. 아들 조주(趙珠)·조인(趙仁)·조우(趙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