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제1차 왕자의 난을 예고하면서 긴장감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이미 지난 15일 방영된 제39회에서 세자자리에서 밀려난 이른바 한씨 소생들 3 형제가 모여 의논하는 장면이 방영 되었는데요.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우(이승효 분)가 고려에 대한 배신을 개탄하며 자취를 감추며 적장자 계승의 원칙이 무너집니다.이는 어떤 대군이라도 세자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얘기. 하지만 이성계는 후처 신덕왕후 강씨(김희정 분)의 아들이며 건국에 아무런 공이 없고 손에 피를 묻힌 적 없는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세자 자리에서 밀려난 삼형제가 모이게 되는데 드디어 제 1차 왕자의 난이 머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후 22일 방영분에서는 이방원이 명나라로 떠나 영락제와 만나는 모습과 23일 방영분 마지막 장면에 조선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장면이 방송되는데요.
실제 이방원은 1394년 그의 나의 28살에 명나라와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 돌아왔으며, 4년이 지난 1398년 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 1차 왕자의 난
제 1차 왕자의 난은 1398년(태조 7)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으로 무인정사, 방석의난, 방원의난, 정도전의 난이라고도 부릅니다.
다시 말해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 간의 싸움인 동시에 정도전 일당과 방원 일당의 권력다툼이기도 한데요.
조선 건국 이후 이른바 논공행상을 통해 개국공신들의 지위가 급격히 상승하였고 특히 개국공신 중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하였습니다. 하지만, 왕실세력 및 무장세력은 정치의 핵심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1398년 이후 이른바 진법훈련이 강화되면서 왕자·종친, 기타 훈신 및 무장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에 대한 통수권이 해체될 단계에 이르면서 방원과 정도전의파의 대립은 극에 달합니다.
방원은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로 개국에 가장 공이 크고 야심과 재질이 큰 인물이었던 만큼 정도전 일파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개국공신에도 책봉되지 못했고, 앞서 언급한거 처럼 세자 책봉 경쟁에서도 탈락합니다.
세자 책봉이 되지 못한 방원은 권력구조의 핵심에서 차츰 밀려나고, 진법훈련이 강화되어 세력 기반의 마지막 보루인 사병마저 혁파될 위기에 놓이자 방원은 정도전, 남은 등이 밀모해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며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단번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트집을 잡아,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해 반대파를 제거하게되는데요.
그는 이숙번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과 남은,심효생,박위,유만수,이근 등을 갑자기 습격하여 살해했고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에 살해하고, 방석의 동복형인 방번도 함께 죽입니다.
이렇게 방원의 정적은 거의 제거되었고, 정치 정세도 크게 바뀌었고 왕자 종친과 조준 등 일부 개국공신 및 방원의 심복인 하륜,이거이,이무등이 실권을 잡았으면서 제 1차 왕자의 난은 끝이납니다.
제 1차 왕자의 난 직후 하륜등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방원 자신이 사양해 둘째 방과가 세자로 책봉 바로 왕위에 올라 정종이 되었지만. 정치적 실권은 방원 일당이 장악하게 됩니다.
(정종의 즉위는 난을 일으킨 후 바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아버지를 협박해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보일까 염려한 이방원 계산)
재미있는 사실은 정종이 즉위한후 실권을 장악한 방원 일당은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병권 집중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개혁을 추진하면서 세력 기반을 강화합니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그를 제거했지만 권력의 구심점이 자기에게 쏠리자, 이제는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죠.
제 2차 왕자의 난
1400년(정종 2)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으로 방간의난, 박포의난으로 불립니다.
앞서 언급한거 처럼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세력구조는 이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만 아직 사병을 거느린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이 여럿 있고, 그들의 세력도 적지 않아 이방원으로서도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고 항상 그들을 견제하게 됩니다.
이중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가 있었으나, 그 위세가 이방원에는 미치지 못했으니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하나의 사건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게됩니다.
바로 박포의 밀고인데요.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지만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해 불평하다가 죽주(지금의 충북 영동)로 귀양을 가게됩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이방간이 이방원에 대해 불평하자 이방간의 거병을 선동하는데요. 박포는 이방원이 장차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합니다. 이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고 이방원과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지만 패하게 되고 이방간은 유배되었고, 박포는 사형을 당합니다.
이로써 이방원을 반대하는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그의 정치적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난이 평정된 뒤 이방원의 심복 신하인 하륜의 주청을 받아들인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 이방원을 왕세제로 책봉합니다. 이어 11월 왕위를 이방원에게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입니다. <어떤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