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세종]세종의 장인, 심온과 병조참판 강상인의 억울한 죽음

심온

 태종은 즉위한 지 18년 8개월 만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상왕(上王)으로 있으면서 세종이 장성할 때까지 나랏일을 직접 처리했는데 내정은 세종에게 일부분 일임하였으나 군권(軍權)만은 내어주질 않았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태종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처남들(민씨 4형제)의 목숨까지도 제물로 삼았던 인물이지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장자가 아닌 셋째로서 왕이 된 아들의 탄탄치 못할 것만 같은 입지를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충녕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배후에서 큰 공을 세운 장인인 심온과 강상인, 류정현, 윤회등의 권력남용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었는데요. 이들 중 태종의 경계 대상 1호는 바로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이었습니다.

  심온은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11살의 어린 나이에 과거급제를 하는 등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출세가도를 달리던 인물로 그의 나이 서른넷에 왕의 셋째아들인 충녕을 사위로 받아들이는 행운까지 얻게 됩니다만 다른 시각으로 볼 땐 음모와 술수가 만연했던 왕의 외척이 되기위한 피의 레이스에 참가하는 티켓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양녕이 폐위되기까지 발생한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에 항상 양녕의 장인인 김한로와 함께 심온의 이름이 거론될 수밖에 없었는데요. 다시 말해서 이때부터 태종의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거죠.

강상인

  이즈음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관계에 대해 세종에게만 보고하고 상왕에게는 보고하지 않자 이에 진노한 태종이 강상인과 박습을 귀양보내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일이 마무리된 후 심온은 사은사로 명나라로 떠나게 됩니다. 사은사로 떠나는 그를 전송하기 위해 명실 공히 최고의 세도가인 그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으려던 사대부와 백성들로 인해 과장하자면 장안이 텅 비어버린 일이 발생하는데 이일을 계기로 태종은 심온을 처단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됩니다.  하지만 이미 사사된 양녕의 장인인 김한로와는 달리 심온의 행적엔 꼬투리를 잡을만한 구실이 보이지 않았는데 당시 심온과 사이가 좋지 않던 박은, 안헌오 등이 예전에 있었던 강상인과 관련된 일의 배후에 심온이 있다는 보고를 합니다.

  태종이 즉위하기 이전부터 가신(家臣)으로서 신임을 받아 세종 원년 병조참판까지 이르렀으나 앞에서의 불미스런 일로 유배를 당했던 강상인은 이 일로 다시 끌려와 박습과 심온의 아우 심정과 함께 국문을 당하게 되는데 고문을 견뎌내지 못한 그는 다음과 같이 거짓 진술을 하게 됩니다.
"신이 박습과 함께 도성 밖에서 심정을 만났는데 심정이 신에게 말하기를 내금원의 결원이 많아 시위가 허술한데 왜 보충해주지 않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군사가 만일 한군데 모이기만 한다면 무슨 많고 적다 하겠는가 했습니다."

  또한 심온과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만 잡혀온 전이조참판 이관도" 이 역모를 주도한 것은 심온의 짓입니다. 권력을 한 손에 쥐려는 모반행위이오니 심온을 소환하여 처형하심이 가할 줄 압니다."라고 문초를 견디지 못해 허위자백을 하고 맙니다.

박은

  박은은 명나라에 간 심온이 돌아오면 그 계략이 탄로날까봐 심온이 돌아오기 전에 강상인, 심정, 박습의 처형을 서둘렀는데 강상인은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조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지에 밧줄을 매달고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에 묶어 극형에 처해졌으며  심정과 박습은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심온 또한 명나라에서 돌라오던 중 의주에서 체포되었으며 이미 그의 무죄를 항변할 이들이 처형당한 터라 순순히 태종이 원하는 대로 자백을 합니다. 외척이 세도를 가장 경계하는 상왕의 노파심과 신흥세력을 몰아내려는 박은 일파의 음모로 심온은 자백한 다음 날 자결로 비운의 생을 마감하며 그의 집안 또한 천민으로 몰락하게 됩니다.

하지만 태종은 심온을 죽이고 그 가족을 연좌시켜 천인으로 만들었지만 그들이 왕비의 가족이므로 천한일을 시키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태종이 죽기 전 안씨의 ㅊㅊ을 삭제할 것을 여러차례 언급한 기록이 있고,

세종 5년 왕비가 외조부인 안천보의 집을 방문하여 잔치를 할때 안씨가 참석하여 함께 즐겼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드라마상에서 왕비의 어머니 안씨가 천역을 하며 관기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내용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듯 합니다.



  심온과 그의 가문에 대한 신원은 태종 사후 2년 후인 1426년 (세종8년)부터 서서히 이루어졌습니다. 심온이 무고는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기에 태종 사후 심온의 직첩과 고신을 돌려주자는 상소가 많았다 합니다. <어떤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