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정조의 친위부대였던 숙위소(宿衛所)와 장용영(壯勇營)에 대해 소개를 해드렸는데요. 이번에는 장용영의 전신인 장용위(壯勇衛)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번 포스트는 문답식으로 꾸며봅니다.
☞ 질문 1) 무과를 통해 2,000명의 대규모 인원을 선발한 이유는?
정조는 1785년(정조 9년) 그의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존호(尊號)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바꾸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경과(慶科: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이를 기념하고자 보이던 과거)를 보여 무과(武科)에서 무려 2,000명을 합격시킵니다. 이는 장헌세자를 추모한다는 뜻도 있겠지마는 상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초석을 만들기 위함으로도 풀이될 수 있는데요.
이듬해 2월 홍복영(洪福榮)의 역모사건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하여 왕의 호위부대 증강이 불가피해지자 이들 경과에 합격한 무사들을 흡수하여 장용위를 설치하고 그들로 하여금 왕권호위의 중심을 이루게 했으며 이와같이 성립된 장용위는 정조(正祖) 17년 장용영(壯勇營) 성립될 때까지 약 500명의 무사(武士)들로 편제되어 있었습니다.
왕의 호위부대인 장용위(壯勇衛)의 설치는 그만큼의 재정이 소비되는 것이므로 이로 말미암아 한양에 있는 다른 군영의 축소를 가져 왔는데요. 이 여파로 훈련도감(訓練都監) 안의 무예(武藝) 출신이라든가 혹은 700명 금군 가운데서 출중한 100여 명이 자연스레 장용위로 넘어 오는 결과가 되어 장용위는 명실상부한 왕권 호위부대로서 위치를 굳혀 나가게 되죠.
이러한 장용위는 정조 17년 정월 장용영 내 · 외영으로 그 규모가 확충되고 정조 자신이 내탕(內帑) · 관방(官房)의 재산까지 내어 재정적 뒷받침을 하여 하나의 군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데요. 장용영은 이제 도성중심의 내영과 수도 외곽인 화성(華城,수원) 중심의 외영으로 확대 편제되어 정조 일대에는 기존의 5군영보다도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는 한마디로 왕권의 강력함을 과시하면서 왕권을 확립시키고자 하는 정조의 철저한 계산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 질문 2) 박대수는 어디까지 승차가 가능할까?
[이산]에서 가상인물인 박대수가 무과를 통해 뽑힌 2,000명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대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에 흥분을 감추지 못 하는데 정조라는 어마어마한 뒷배경을 가진 박대수는 과연 어디까지 승차할 수 있을까요?
장용영의 총 책임자는 장용위 때 이미 장용영(壯勇營) 병방(兵房)이라고도 했는데 이를 개칭하여 장용사(將勇使) 혹은 장용영대장(將勇營大將)이라 했으며 그 규모는 내영 하나만으로도 다른 군영과 동등한 규모를 가지게 될 정도로 대단하였습니다. 예상컨데 박대수는 아마 장용영대장(將勇營大將)까지 승차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 질문 3) 정조가 죽은 후 장용영의 운명은?
장용영의 설치는 앞에 언급한 것처럼 다른 군대의 축소 또는 이동등으로 군영체제에 상당한 혼란을 수반하였으며 이들 군영들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이 또한 정조의 계획으로 여러 적대되는 대신 세력 간의 정치적인 대립에서의 왕권 강화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왕권강화책의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장용영은 정조가 승하한 후 뒤를 이은 순조 때에 왕권이 급격히 약화함으로써 혁파되고 맙니다. 따라서 그의 운용을 위하여 내어 놓았던 내탕 · 관방의 재산은 혜청(惠廳) · 호조(戶曹) · 훈국(訓局) · 어영(御營) · 금영(禁營) · 군기시(軍器寺) · 병조(兵曹) · 경기(京畿) 및 각도에 분급되었고 또한 외용영에 속해 있던 관원과 군사도 신설된 것은 혁파하고 이속된 것은 되돌리는 등으로 정리하고 궁궐 숙위의 임무도 본래대로 무예별감(武藝別監)에게 넘어가죠. 뿐만 아니라 수도방위도 종래와 마찬가지로 훈련도감 · 금위영 · 어영청의 3군문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왕권호위의 임무도 용호영(龍虎營)으로 되돌아 가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