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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왕세종]에서 미개한 해적무리 정도로만 치부했던 대마도(大馬島:쓰시마섬) 왜구들이 본토와의 지원을 모색하는 등 군대로서의 면면을 갖추어 조선을 침탈할 야욕을 보이자 세종은 상왕(태조 이방원)과 뜻을 함께하여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는데요.

 이상한 건 우리가 역사 시간에 귀가 따갑도록 들은바 있는 대마도 정벌의 진짜 주인공을 배제한 채 세종이 보위에 오르기 전 유배지인 함길도에서 인연을 쌓은 최윤덕 장군만 부각을 시키고 있네요. 물론 세종이 함길도에 있었던 것도 허구이지만 조선 최초의 대규모 해외 정벌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그 주인공마저 부각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작가가 자유롭게 펼치고자 했던 극적 상상력을 고려하더라도 많은 아쉬움이 남네요.


대마도 정벌의 주인공 이종무(,) 소개합니다.

 1360년(고려 공민왕 9년) 무인의 아들로 태어난 이종무는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로 이미 그 유능함이 알려졌으나 그가 고려 조정에 이름을 알린 것은 바로 1381년(우왕 7)에 강원도에 출몰한 왜구를 아버지와 함께 격파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이미 왜구는 서해안과 남해안에는 수시로 출몰하는데 강원도의 출몰은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어서 당시엔 상당히 충격적인 도발로 여겨졌던 이 사건을 이종무 부자(父子)의 지휘하에 막아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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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 된 후에도 왜구 격퇴에 앞장섰으며,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방간의 군사를 괴멸시킴으로써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었으며 이후 그는 좌군절제사,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세종 즉위 다음해인 1419년에는 삼군도체찰사에 오르는 등 왜구진압 최고의 전문가로 명성을 떨칩니다.

 그 해 5월 드라마에서처럼 대마도 왜선 39척이 비인현(지금의 충남 서천)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의 해협에 있어 중개역할을 하는 특수한 사정도 있거니와, 원래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식량을 외부에서 충당해서 생활하여야 하므로 고려 말부터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공(朝貢)의 형식을 취하여 그 대가로 쌀을 받아 갔으며, 조정에서도 그들을 회유하고자 대마도를 우대하여 주었지만 기근이 심할 때면 그들은 해적으로 돌변하여 해안을 약탈하므로 조정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였는데 비인현 침탈처럼 조직적인 도발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기 충분했던 거 같습니다.

  이에 한 달 뒤인 1419년 6월 조정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이종무를 총지휘관으로 하여 휘하에 9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병선은 227척, 군사는1만 7천여명, 식량은 65일분의 대규모 정벌대를 꾸려 출진을 하게 됩니다. 이는 단군 이례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최초의 대규모 해외 군사 작전으로 기록되기도 하는데요. 태종(이방원)의 지극한 사랑을 받던 이종무는 육지전을 주로 하는 무인이었지만 왜구의 전술을 가장 잘 아는 무인이기도 하였기에 당시 군사권을 주도하고 있던 태종으로서는 그를 믿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종무 부대는 이튿날 대마도에 진입하여, 129척의 선박을 노획, 쓸 만한 20여 척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으며 가호 약 2천 호를 소각하고, 적군의 수급 114급을 참수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규슈[九州]의 제후(諸侯)를 총동원하여 대마도를 방어하게 하였으므로 원정군은 대마도 전체를 토벌할 수 없었으나,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왜구 측의 평화협정 제의로 그 해 7월 3일 거제도로 철군했습니다. 기해년이었으므로 이 정벌을 일명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합니다.

  대마도를 완전히 토벌하지는 못했지만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후 백여 년간 대규모의 왜구는 사라졌고 이를 통해 조선은 수십 년간 계속되던 조선의 근심거리를 제거하고 평화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으며 대일 외교의 새로운 전기가 되는 초석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종무는 대마도 정벌 후 찬성사로 승진하였지만 이후 불충한 김훈(金訓) 등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탄핵을 당하여 유배되기도 했지만 복관되었고 이후 부원군에 진봉되었다가 한차례의 귀양을 더 겪은 후 다시 복관되었다가 1425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1995년 5월...
 1,200t급의 대한민국 다섯 번째 국산잠수함이 탄생하는데요.

이 잠수함이 바로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장군의 이름을 딴 "이종무함"입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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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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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사극전쟁 MBCvsKBS 사실 vs 재미

    Tracked from 주니의 NBA 난장질 2008/06/09 16:17  삭제

    <이제 막을 내리는 이산> TV브라운관은 요즘 사극 전쟁입니다. 홍길동 이산 일지매 그리고 대왕세종 정말 사극의 르네상스라고 생각됩니다. 사극만 잘챙겨봐도 국사50점 맞습니다. ㅋㅋ 그런데 이 사극 제작에 각 방송국별 특징이 있습니다. MBC 사극 일단 극적 재미의 극대화 엠본부는 일단 사극의 재미에 집중합니다. M본부의 사극은 정말 기나긴 역사를 자랑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을 내세우는 원톱사극중심인데 근 10년가까이 3대 방송사의 사극경쟁에서 우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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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랑합니다. 2008/06/09 0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그렇구나~

    신기하다;;

  2. 수니비 2008/06/09 0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사실은 성공한 정벌은 아닙니다. 이종무가 무지 운이 좋왔고(이종무의 군대를 대마도 사람들은 자기내 배인줄 알고 처들어 오는 것을 보면서 환영 준비를 했습니다.) 쉽게 상륙해서 포구는 점령을 했는데 산으로 숨은 왜구 추적은 무리가 있었음에도 상부에서 쉽게 전쟁 이겼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부대를 편성해서 산으로 올려 보냈는데 그 편성된 박실을 부대는 제비 뽑기를 해서 선택된 부대입니다. 이 부대는 100명가까운 사망자를 내는데 왜구에 기습에 놀라 절벽으로 떨어져 사망합니다. 결국 이종무는 귀향 갑니다. 공이라면 신속하게 군을 편성해서 기습을 주도한 태종에게 있습니다. 대마도에서는 이렇게 빠른 기습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3. 역사스페셜 책을 보니 2008/06/09 1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니비님 같은 얘기는 전혀없던데요... 그리고 성공한 정벌이 맞습니다. 이후로 대마도의 지배세력에게 우리나라 관직을 주었고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남해의 두다리로서 제주도와 같은 취급을 받았고요 지도에도 우리나라 땅으로 다 나오더군요. 일본의 지도에서도 대마도는 나오지 않고 메이지유신때부터 그 중요성을 알고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지도에도 나오게 되었지요. 그리고 거의 모든 싸움에서 다 이겼고 딱 한번 매복에 걸렸던가해서 한번 패했지요... 대마도정벌은 명의 해금정책에 심해지던 해적의 노략질에 명이 들고일어나려하자 우리나라가 또 전쟁터가 될까 우려되어 먼저 선수를 친 아주 훌륭한 계획하에(예를들어 나라의 방비도 튼튼히하고 배도 160여척 새로 만들고 전 해군의 1/3을 동원하고 65일치의 식량을 실었던-10일정도밖에 전쟁을 하진 않았지만 결과도 좋았던.) 진행된 대승한 정벌이었습니다.

  4. 아 그리고 2008/06/09 1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속하게 기습을 주도했다기 보다는 왜관을 폐쇄하고 반발할만한 일본인들은 십몇명인가 이십몇명인가도 처벌하고 일인을 가두어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정보 단속을 잘했기 때문에 더욱 성공한 전쟁이었지요. 당시 대마도 사람들은 여몽연합전쟁때처럼 명나라와 함께 조선이 쳐들어온거라고 생각했다고합니다. 그리고 견내량에서 해류를 타고 하루만에 대마도에 도착할수있었기때문에 더 성공했던거고요.

  5. 수니비 2008/06/09 1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용환씨가 쓴 조선의 왕이란 책하구요.(이 책은 상당히 객관적입니다. 세종도 비판을 하죠)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엽기 조선왕조 라는 책을 보시면 됩니다.

    잘못 알려진 대표적인 역사가 이 대마도 정벌입니다 사실 대마도가 노략질을 그만 둔 것은 대마도 인들 대부분이 명나라 노략질에 나섯고 그 빈틈을 노린 결과 입니다. 또한 우리는 미리 명에 왜구의 해방을 알려줘 명이 대승하게 도와 줍니다. 전술 자체는 훌륭했는데 전투는 형편없었습니다.

    • 한번읽어봐야겠군요 2008/06/09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마도는 해적질로 먹고 살았는데 고려/조선이 해금정책을 쓰면 중국에가서 해적질을 일삼고 중국(명)이 해금정책을 쓰면 고려/조선에서 더 극성이었지요. 근데 궁금한게 있는데 '객관'이라는 게 '비판'이 있으면 객관이고 비판이 들어있는책은 다 옳다고 할수있는걸까요?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기때문에 사실 '객관'이라는게 어려운거같아요. 또 책들마다 같은 사건도 다른 시각으로 적혀있고요... 우선 임용환씨의 책과 엽기조선왕조라는 책을 좀 읽어보는게 우선이겠고. 저는 같은 책이라면 왜 더 자랑스러운 우리역사를 먼저 생각지 않고 격하시키는 걸 사람들이 더 선택하는지 모르겠네요. 식민사관이 배재된 실제의 역사가 참 궁금합니다. 아 그리고 그럼 역사스페셜 방송도, 책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하는지.....

  6. ㅄ수나비 2008/06/09 1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먼 개소리냐? 니가 맨첨에 지껄인 발언에 대해서 책임을 지란 말이다 왜 뒤에가서 꼬랑지 내리고 말을 슬슬 돌리고 지랄이냐?

  7. ㅄ수나비 2008/06/09 1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먼 개소리냐? 니가 맨첨에 지껄인 발언에 대해서 책임을 지란 말이다 왜 뒤에가서 꼬랑지 내리고 말을 슬슬 돌리고 지랄이냐?

  8. ㅄ수나비 2008/06/09 1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먼 개소리냐? 니가 맨첨에 지껄인 발언에 대해서 책임을 지란 말이다 왜 뒤에가서 꼬랑지 내리고 말을 슬슬 돌리고 지랄이냐?

  9. 수니비 2008/06/09 1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술은 훌륭했는데 전투는 형편없었죠. 그럼 실패한 정벌입니다. 사람들은 사실 역사적 사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멋있게 보이는 것을 원할 뿐이죠.
    대마도 정벌이 대표적인 것멋든 역사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모양 이꼴인것은 사람들이 내용보다는 겉포장에 신경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 대마도 정벌의 전투가 얼마나 형편없었냐면 당시에 대마도에서 구출한 중국인들이 있었는데 대신들은 이 중국인들이 우리 조선군의 형편없는 모습을 다 보았다고 창피하다면서 중국에 돌려보내지 말자고 주장을 합니다. 이정도면 말 다한거죠?

  10. 송수빈 2008/06/09 17: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인용한 책을 정확히 써야 겠군요. 도서출판 혜안의 조선국왕 이야기(지은이:임용한) 도서출판 추수밭의 엽기 조선 풍속사(이성주 지음)

    이책에 정확한 대마도 정벌의 사실이 나옵니다.

  11. 수니비 2008/06/09 1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왕조 실록 내용
    <조선왕조 실록 세종 1년 8월 16일자 기사>

    의금부 제조 변계량 등이 수강궁에 가서 아뢰기를,
    “어제 명령을 듣고 박실의 패군한 죄를 국문하오니, 실이 공술하기를, ‘이종무가 처음에는 삼군 삼절제사에게 명령하여, 다 육지에 내려서 싸우라고 하더니, 뒤에 명령을 변경하여, 삼군 절제사 각 한 사람만이 육지에 내리라고 하여서, 실이 제비를 뽑게 되어서 내렸던 바,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여서, 두 번이나 보고하여 구원하기를 청하였으나, 종무가 들어 주지 아니하고, 유습과 박초 등도 역시 내려와 구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패전하게 되었다.’ 하오니, 신들의 생각에는 특별히 박실의 죄뿐이 아니고, 종무와 습과 초도 다 유죄하오니, 모두 국문함이 옳은가 합니다.”
    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박실의 패군한 죄는 모두 다 아는 바이지만, 만약 법대로 논한다면, 유정현이 도통사가 되어서 즉시로 실을 구속하고 벌을 줄 것을 청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것은 역시 죄되는 일이므로, 이제 장온을 무고죄로 벌주고, 여러 장수들을 상주었다가, 또 다시 정현과 종무를 옥에 하옥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하물며 동정할 때에는 승리가 많았고 패전은 적지 않았는가. 뒷날의 일도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대거(大擧)할 계획을 한다면, 또한 권도(權道)를 써야 할 것이나, 내 어찌 그런 일로 하여, 끝까지 그 죄를 치죄하지 않을 수야 있겠는가. 이제 실은 공신의 자식이라 하여, 면죄시키게 하라.”




    사실, 이종무의 초반 승리는 왜구들이 단지 기습을 당했기 때문이며 그는 왜구들이 재정비하여 반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전 부대를 상륙시키기 보다 주력부대는 그대로 배에 둔채 소위 "제비뽑기"로 걸린 부대하나만 보냈다가 박살이 났으며 그 상황에서 반격은 고사하고 구원을 하지도 않은채 그대로 퇴각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정벌도 아니며,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지도 않았으며, 제대로 된 승리조차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단 귀환하고 돌아온 그는 영웅으로 대접받았으나 며칠도 안되어 "실상"은 드러났고 그는 곧장 탄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적 체통상 "사소한" 문제는 그대로 넘어갔던 것입니다.



    이후에도 왜구들의 공세는 전혀 줄지 않았고 조선군은 재차 출병했으며(그 결과에 대해서는 조선실록에서는 단지 "갔다 왔다" 한마디로 끝나 있습니다.) 경상도, 전라도의 방비도 강화되었습니다. 왜구가 완전 토벌되었다면 불필요한 일이었죠.



    대마도가 경상도에 복속되었다라는 것은 이후에 대마도주가 식량부족으로 인해 조선에 복속을 요청했고 조선은 형식상 대마도를 조선의 땅으로 복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그대로 "형식적"인 것으로(명이 조선을 형식적으로 봉했듯이) 중앙에서 우리 관료가 파견되어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며 얼마되지도 않아 또 원상복구되어 여전히 대마도산 왜구는 조선의 골치거리로 남았습니다. 즉, 이종무의 "대마도정벌"의 진짜 진실은 이런 것이었으며, 케사르의 갈리아정복같은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정사를 보았다. 허조가 계하기를,

    “대마도의 사자를 어떻게 처리하리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왕(父王)께서 말씀하시기를, ‘대마도가 송희경(宋希璟)을 박대하였을 뿐 아니라, 또 그들의 말이, 우리가 등차랑(藤次郞)과 삼미 삼보라(三未三步羅)를 돌려보내면 영구히 태평하게 될 것이라 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무례하므로, 다시 수군 절제사를 보내어 수군을 정비하여 거제도에 정박(定舶)하여 두면, 대마도 왜인들이 반드시 항복할 뜻이 있을 것이니, 이렇게 하면 변방에 대한 근심이 없게 될 것이다고 하셨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상왕께서 이미 신 등에게 이 일을 의논하라 하시기에, 신 등이 삼의정(三議政)과 같이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저들이 비록 무례하나, 그 사신을 구류하는 것은 너무 급하고 절박한 일이라.’ 하였으나, 상왕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자를 구류해 두고 우리 수군을 시켜 거제도에 나누어 정박케 하여 위력을 보이면, 저들이 반드시 항복해 올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책략이라.’고 하시기에, 신 등이 다 선지(宣旨)에 따르려 하였습니다.”

    하고, 평양 부원군(平陽府院君) 김승주(金承?)는 아뢰기를,

    “저들이 비록 패역(悖逆)한 말이 있었다 하여도 동정(東征)한 뒤부터 저희들의 악한 것은 반성하지 못하고 분이 나서 그런 것이니 족히 책망할 것이 없습니다. 마땅히 듣고도 못 들은 체하고 엄연히 우리만 스스로 강하게 하고 있다가, 저들이 변방에 침범하거든 우리는 우세한 병력으로 대응하면 어찌 이기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또 지금 있는 왜사(倭使)가 겨우 20여 명 뿐이니, 그들이 가거나 있거나가 그다지 보탬이나 손해가 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대로 그러하였다. 내가 이미 다 알았노라.”

    하였다. 허조가 아뢰기를,

    “상왕께사 수군 절제사를 명하여 거제도에 나누어 정박시키고 그 사자를 구류하고자 하시는 것은, 대마도가 〈우리 나라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덕을 배반하여 다시 우리 국경을 침범할까 함이시니, 만약 먼저 일본을 설유(說諭)하면 저들이 또 대마도를 그르다 하여 배척하게 되어, 대마도의 형세가 고립될 것이고, 또 저들이 송희경에게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정말 그들이 배반하고 있는가는 적실히 모르는 것이니, 만일 배반할 마음이 없다면 그 사자를 구류하는 것은 너무 급하고 절박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마도 왜인이 이다지 무례한데, 그 공헌(貢獻)한 물품을 받는 것이 불가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공물을 물리치고 그 사자를 박대하고, 한편으로 구주 절도사의 사자만 후대하여 은혜와 신의를 차별하여 보이고자 한다.”

    하니, 박은이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지당하오니, 그 사자를 다른 곳으로 사관(舍館)을 옮겨서 식량만 주고 밥을 자신이 지어 먹도록 하고, 또 그들을 불러 대마도의 배은망덕한 사유를 엄중히 계칙하여, 갈 때도 타고 갈 말을 주지 말고 구주 사자(九州使者)만을 후대하여, 저들이 서로 그 이유를 알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내가 장차 상왕께 아뢸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나간 뒤에, 박은·허조·원숙을 명하여 대마도 사자에게 개유(開諭)할 말을 의논해 들이라.”

    하고, 또 조말생·원숙을 불러 보고 말하기를,

    “경들이 부왕(父王)께서 왜사(倭使)에게 개유하실 말씀을 들었는가.”

    하니 말생 등이 아뢰기를,

    “다만 병선을 모아 해변을 방비할 뜻과 또 대마도 왜인의 오만무례한 죄를 수죄(數罪)하실 말씀을 들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구주 절도사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반드시 경동(驚動)하여 요란케 할 것이니, 꼭 구주(九州)에 이런 뜻을 개유해 주라.”

    하니, 박은이 그 사연을 즉시 초(草)하여 올렸다. 말생을 명하여 그것을 상왕께 가지고 가서 계주(啓奏)하라고 하였다.

    경상도 좌도 수군 도안무 처치사가 계하기를,

    “대마도 왜적은 잠시 복속(服屬)하였다가는 잠시 후에 또 반역하게 되어,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마땅히 경비를 엄하게 하여야 하겠사온데, 신의 관할하에 있는 12포구에 머물러 있는 병선이, 혹은 3, 4척, 혹은 5, 6척이어서 매우 적고 약하오니, 수륙(水陸)의 멀고 가까운 요해처를 분간하여, 여러 포구의 병선을 모아서 즉시로 변란에 대응하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12. 수니비 2008/06/09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엽기 조선왕조 실록 이라는 책의 내용

    [엽기조선왕조실록] 4. 대마도 정벌의 비밀


    일본의 독도망언 앞에 마산시 의회가 대마도의 날 조례안을 제정하면서 새삼 이종무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등장하고 있다. 조선 최초이자 최후의 일본원정이었던 대마도 정벌,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역사의 진실일까?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때는 1419년 5월 충청도 땅에 왜구가 출몰하였으니,




    “전하! 왜구들이 충청도에 들이닥쳐 닥치는데로 살육과 약탈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그런가? 음…일단 쌀을 줘서 달래보는게….”




    세종은 일단 쌀을 주어 달래보려 했으나, 왜구들은 쌀을 가져간 사람들까지 잡아버리며 행패를 부리게 된다. 더구나 명나라에서 조만간 토벌군을 일으킬거란 말이 들려오자 조선은 다급해 지기 시작했다. 만약 명군이 조선으로 건너오면 그 뒤치다꺼리는 고스란히 조선의 몫이 아니던가?




    “이…일단은 저기 거제도에서 매복해 있다가 돌아오는 왜구들을 박살내는 방식으로….”




    “그게 무슨소리요. 주상! 남자가 치사하게 매복이나 하고 말야…. 한큐에 대마도를 박살내버리자고!”




    상왕자리에 앉아있던 태종이 두팔 걷어붙힌 것이다. 군권은 아직 태종의 손에 있었던 시절, 태종은 당장 동원령을 내려 군사와 병선을 모았다. 227척의 배에 1만 7,285명의 병사, 그리고 65일치의 식량을 준비한 태종은 이 병력과 물자를 이종무에게 맡기게 된다. 이종무는 총사령관이 되어 대마도로 쳐들어가는데,




    “어라, 저것들이 왜 우리한테 손을 흔들지?”




    “아…, 우리를 귀환하는 왜구로 아는가 본데요?”




    “그래? 그럼 우리도 같이 손 흔들어주자. 오겡끼 데스까~와타시와 겡끼데스~.”




    “자…장군 너무 오바하시는것이….”




    조선군의 배를 왜선으로 착각한 대마도의 왜구들은 조선군의 기습 앞에 맥없이 쓰러지게 되는데, 변변한 전투 한번 없이 114명의 왜구를 죽이고, 포구를 장악한 조선군은 기세등등했다. 잡혀간 중국인과 조선인도 구출했겠다, 왜선들은 다 불태우거나 노획했고, 민가 2천채도 다 불태워버린 조선군. 더구나 왜구들은 급작스런 공격에 놀라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산으로 도망간 상황!




    “왜구 그까이거 뭐…그냥 손이나 몇 번 흔들어주고 활로 대충 쏘면 되는거 아냐.”




    “그런데…우린 왜 계속 여기 짱박혀 있는 건가요?”




    당시 이종무는 대부분의 병력을 아직 배위에 태워놓고 여차하면 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란게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존재아니던가?




    “이 참에 한번 쳐들어 가볼까? 못 먹어도 고라는데…. 약은 다 깨졌고, 광 깨졌고….”




    “장군, 아직 고도리가 살아있습니다!”




    “음…고다! 그런데 누가 올라가지?”




    “아무래도 가위바위보로 결정하심이….”




    “장군 사다리 타기도 있습니다!”




    “밤일낮장! 패를 돌리심이 옳은줄로 아옵니다!”




    “제비뽑기로 하자. 각부대장들은 제비를 뽑아서 걸린부대 3개 모아서 올라가는거다. 불만 없지? 그럼 제비뽑기 한다.”




    그렇게 제비뽑기로 공격대의 병력을 뽑은 이종무는 병력을 왜구들이 도망간 산으로 올려보내게 된다. 역시 군대는 줄을 잘서야 하나보다. 문제는 재수없어서 공격대로 뽑히게 된 조선군들의 사기가 있었겠냐는 것이다. 이들은 죽지못해 산으로 올라가다 왜구들의 기습에 맥없이 쓰러지게 되는데, 한번 교전에 180여명의 조선군이 죽게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때 조선군들은 이걸 보면서도 멀뚱멀뚱 남의 일 보듯이 배위에서 쳐다봤다는 것이다.




    “뭐, 이 정도면…하하…할만큼 했으니까 이제 그만 귀환하는 것이 좋겠지?”




    “마…맞습니다. 장군 전사에 기록될 대승이옵니다. 적의 본거지를 점령했으니…. 하하. 쥐도 구석으로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데…이만 귀환하심이 옳은줄로 아옵니다.”




    결국 이 한번의 패배 이후 이종무는 그대로 귀환하게 된다. 그냥 포구에 지키고 지구전으로 갔어도 충분히 이길수 있는 전투였건만 이종무는 황급히 귀환하게 된다. 자, 문제는 이 다음부터인데, 이종무와 토벌군은 일약영웅이 되어 이종무는 찬성사로 진급하게 되고 토벌군들도 상을 받게 되는데…. 그러나 이런 꽃길도 얼마가지 못하게 된다. 바로 이 제비뽑기 공격대의 진실이 밝혀지면서부터다.




    “아니, 지금 이종무를 벌주는게…. 방금 전에 진급시키고 상 줬는데….”




    “그래도 공과는 명확히 해야 합니다! 가위바위보라면 모르겠지만 제비뽑기라뇨!”




    “음…그렇다면….”




    결국 이종무는 토벌군에 불충한 자를 넣었다는 애매한 이유로 상원땅으로 유배를 가게 되면서 대마도 정벌은 끝이 나게 된다. 역사속에서는 민족의 자존심으로 그려져있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그러나 그 실체는 제비뽑기로 병사들을 뽑아 사지로 몰아넣은 코미디 같은 이야기 였었다니. 마산시의회의 ‘대마도의 날’ 제정을 생각해 본다면 좀 부끄러운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13. 역사인 2008/06/09 1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했지만 겉만 애기하고 속은 애기안하시네요.

    이종무가 대마도에서 활약을 한건 맞습니다만 세종실록에보면 "상륙하고 마을을 불태우고 산에 군사들을 보냈으나 왜구들의 매복에 걸려 항구까지 도망치며 왜구들에게 살해 당했으며 배에 있는아군들은 그걸 지켜만 봤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일본보고 역사왜곡하지만 한국도 왜곡하긴합니다.
    승리의 역사보다 패배했던 역사도 알려주는게 어떨까요.

    윗분말대로 대마도에서 상륙은했지만 거의 패배했습니다. 결과는 승이지만.

  14. 어울림 2008/06/09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왕세종은 그냥 역사왜곡 드라마..
    양녕이 충녕에게 칼 들이댈 때부터 알아봤음

  15. 전반대 2008/06/10 0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왕세종.. 몇몇 억지 설정-> 예를 들면 장영실의 사랑이야기, 세종의 유배등

    만 빼놓고 보면.. 놀랍도록 현실적이라고 보는데요. 당시의 상황이나 캐릭터들이 너무나 현실감 있게 살아있다고 할까요? 내용 전개가 너무 치밀(어렵다는 느낌이 있죠)해서 좀 매니아 드라마처럼 됬지만..

    이제껏 본 어떤 사극 보다 현실적이라고 느끼는데요.
    (최소한 엠본부에서 송연이랑 러브라인만 타고 있는 모드라마나 태왕이 포탈로 들어가던 모드라마나 그 동안의 케이본부에서 영웅 혼자 적진을 궤멸시키던 그런 드라마 보다야 훨씬^^)

    저도 어제 보면서 이종무를 배제한 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6. 전반대 2008/06/10 0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덧붙여서 양녕이야기로 역사왜곡이라 하심은.. 좀 무리죠.

    왕자들간의 왕위 다툼이 있는 상황에서 왕실내에 칼부림 있는 건 예사니까요.
    오히려 태종 세종대의 시대는 낭만이 있었다고 할까요? 태종 이방원은 자신에게 칼을 들이댔던 동복형 방간을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수를 누리게 해주었으며... 세종 역시 양녕이 천수를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해줌은 물론이고 오히려 양녕과의 우애가 극진했다고 전해지니까요.

    양녕이 충녕에게 칼을 들이댄 사건은 충분히 있을 법한 사건입니다.

  17. 전반대 2008/06/10 0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나비님의 의견에 댓글을 달아봅니다....
    결론은... 세종대의 대마도 정벌로 인해서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는 것 -> 그 후 200년 가까이 조선의 바다는 평안했다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정벌은 성공했다고 봐야죠.

    덧붙여서.. "책"에 적혀있다고 모두 사실은 아닙니다.
    특히나 "엽기 조선왕조실록"같은 책은 작가의 사견이나 야사들이 많이 적혀있는 책으로 그냥 재미정도로 이럴 수도 있었겠구나 정도로 읽으시는게 좋을듯^^

  18. 수니비 2008/06/10 0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마도 정벌로 인한 왜구의 침탈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당시 대마도들은 중국을 노략질 하러 갔습니다. 만명 가까운 인원이 대마도를 떠나 명으로 향하고 있었죠. 조선은 이걸 탐지하고 명나라에 미리 이야기를 합니다. 따라서 명은 대마도 왜구의 절반을 전멸 시키죠. 50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냅니다.

    그런대 우리의 대마도 정벌로 죽은 왜구의 숫자는 100여명 정도입니다. 즉 대마도에 처들어 가지 않았어도 왜구의 노략질은 200년 가까이 없을수 밖에는 없었고 명이 졌다고 하면 오히려 당시 수군의 1/3을 차출한 조선은정말 위험한 상태가 되었을 겁니다. 세종은 이걸 잘 알았기 때문에 전면적인 대마도 침공이 아닌 돌아오는 왜구를 기습하자는 안건을 태종에게 올리죠. 그런데 태종은 무리하게 정복 전쟁을 벌이다 보니 사상자가 많이 났습니다. 홈에서 싸우는 것과 어웨이에서 싸우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죠.

    만약 세종의 의견대로 돌아오는 왜군을 우리 근해에서 기습하였다면 돌아오는 5000명 대부분이 사망했을 것이고 대마도는 우리의 땅이 되었을 겁니다. 이미 상당한 타격을 입은 대마도 왜군은 우리의 기습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칠대로 지친 군대는 정말 손쉬운 먹이감이니까요.

    역사는 반복되는 겁니다. 위정자의 순간의 잘못된 선택은 수백년간 그 국가를 괴롭힙니다. 역사에서 정확한 성공과 실패를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같은 잘못을 반복할수 밖에는 없죠. 결과가 아닌 과정을 봐야 합니다.
    세종이 위대한 군주인것은 우리 역사상 유일 무의 하게 과정을 중시한 위정자였습니다. 사실 세종이 추진한 많은 일중 결과적으로 실퍠한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결과의 실패를 결코 신하들에게 잘못을 묻지 않은 왕이 세종입니다. 과정이 성공적이라면 결과를 중시하지 않았죠. 반대로 결과가 좋아도 과정이 좋지 않으면 무거운 처벌을 한 왕도 세종입니다. 각 고을의 수령이 법을 처리한 것을 일일히 점검한 것이 세종인데 과정이 신통치 않고 결과만 그럴싸한 판결을 한 것을 다시 수령들에게 돌려보내 새롭게 판단하라고 한 것은 세종이니까요.

  19. 수니비 2008/06/10 0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반대님 제가 위에 조선왕조 실록의 한 부분을 그대로 옴겨 놨습니다.

    보시면 엽기 조선왕조 실록 그대로 입니다. 재미있게 말을 붇인것 뿐이죠. 참조하시길......

  20. 수니비님 말이 맞는데요 2008/06/13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복걸려서 100여명이 죽습니다. 일본측 기록은 1000명으로 기록하고 있지요. 그리고 중종때부터 왜구들이 엄청 난리를 치게 되죠. 삼포왜란이 터지고 명종때는 을미왜변 터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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