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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일지매] 인조가 광해군 얘기에 민감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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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과 정실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를 직계(直系), 후궁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방계(傍系)라고 하는데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이른바 방계승통으로 왕이 되었으니 이것이 본인에게는 큰 오점이 아닐 수 없었죠. 게다가 세자 책봉 과정에서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선택된 터라 중국의 고명을 받지도 못했으며 중신들의 모략으로 말미암아 선조의 선위 교서를 받지 못해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겨우 왕위를 넘겨 받게 됩니다.

  왕권에 대한 이 같은 위협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 제거 작업에 몰두하게 했으며 그의 지지파인  대북파가 앞장서서 임해군을 비롯하여 영창대군, 능창군 등의 왕족과 그들을 지원하던 소북파와 서인, 남인 세력을 차례로 제거하였으며 인목대비마저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켜버립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인 능양군을 중심으로 그동안 광해군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세력들은 이를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으로는 능양군이 추대되는데요. 이것이 1623년 일어난 인조반정입니다.

  광해군은 재위기간은 15년이나 인조반정 후 유배기간이 18년이나 되는 참으로 비운한 생을 살다 마감했지만 임진왜란 이후 혼란에 빠진 사회를 복구하고 과감한 현실 정치와 외교를 통해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한편,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그동안 정권을 장악했던 대북파 인사들을 처단하고 친명 사대주의를 표명하며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후 발생한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고 결국 청과 굴욕적인 군신 관계를 맺는 이른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고맙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 경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파탄지경에 이르고 민간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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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전도의 치욕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신하들과 더불어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 군사와 대치하였는데 이듬해 1월 하순에 왕자와 왕족들이 피난간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또한 산성에 비축한 식량이 바닥이 나자 45일 동안의 대치 끝에 부득이 1월 30일 청나라 군영이 있는 한강 가의 나루터인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으면서 인조는 청태종의 요청에 따라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이마를 아홉 번 땅에 대는 항복의 수욕(受辱)을 겪었다.

  이런 정국 및 민생파탄을 이겨내기 위해 인조는 대대적인 민생 안정책을을 실시하는데 대동법 실시, 양전세법 폐지, 상평통보를 주조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이들정책의 대부분이 광해군대에 시행된 것이었으며 이마저도 큰 효과를 얻지는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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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광해군대에 빛을 내뿜었던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정책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치욕적인 굴욕외교로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게 하였으니 인조는 집권기간 내내 그가 폐위시킨 광해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일지매>에서 광해군의 얘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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