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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바람의 나라]여진왕자의 죽음은 유리왕의 목숨마저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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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명태자가 자결한 후 유리왕은 장남인 도절과 둘째 해명, 두 아들을 죽게 만든 잔인한 임금이라는 백성의 원성을 듣게 되고 고구려의 민심은 심한 동요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를 기회 삼아 동부여의 대소는 유리왕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을 섬기지 않으면 고구려를 침략할 거라 협박을 하자 고구려에는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국운은 끝난 게 아니었으니 이 무렵 동부여에서도 대소와 그의 여섯 형제들 간에 내분이 발생하여 유리왕은 동부여의 침입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죠.

 몇 년후 한나라와 고구려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이 틈을 노려 대소가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고구려 수비대의 전략에 말려 대패하고 마는데요. 이 수비대를 이끈 인물이 바로 무휼왕자였습니다.

 계속된 승전으로 자신감을 얻은 유리왕은 같은 해 그 유명한(?) 오이와 마리에게 군사를 주고 고구려 서쪽의 양맥을 치는 동시에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정복하는데 성공합니다. 요서지방의 전초기지인 고구려현을 차지한 것은 한나라의 동방정책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획기적인 성과로 이를 계기로 유리왕이 열망한 영토확장의 대업은 날개를 달게 됩니다.

 
하지만...
 
 4년 후 두 아들을 잃고 난 후에 가장 총애했던 넷째 여진왕자(김혜성분)가 익사하는 또 한 번의 불행을 겪게 되는데요.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유리왕의 건강은 급격하게 쇠퇴하여 더는 전장에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결국, 유리왕은 병약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휴양처에서 휴양을 하다 한 많은 생을 마감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57세(추정)였습니다. <어떤오후>

☞ 참고
 - 바람의 나라 제대로 알고 보기
 - 해명태자 죽음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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