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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대왕세종]명나라 정보기관 동창은 어떤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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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때 황제의 정보기관을 창위(廠衛)라 합니다. 창(廠)은 동창(東廠), 서창(西廠), 대내행창(大內行廠)을 말하고, 위(衛)는 금의위(錦衣衛)를 말하는데 이를 합쳐서 창위라 하는 것이죠.

 금의위는 동창등의 환관처럼 황제와는 가깝지는 못했기에 창의 세력이 위보다 컸습니다. 금의위는 기본적으로 모든 관료를 정탐했지만 창은 관민과 금의위를 감시했으며, 대내행창은 관민과 창위를 감시했으니 창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창은 사법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황제의 영을 받아 사건을 처리하고, 관리와 백성을 체포하였으며, 형이 지극히 잔혹하여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합니다.

동창의 수장 "왕진"


  "대왕세종"에 등장하는 동창(東廠)은 제3대 영락제가 선대왕인 제2대 건문제의 잔당을 색출하고 민정을 살피고자 영락18년(1420년)에 북경의 동안문 북쪽에 설립된 기관으로 환관이 제독(提督)을 맡았습니다. 권력은 금의위보다 컸으며 황제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할 수 있었습니다. 사법기관을 거치지 않고 마음대로 관리와 백성을 체포할 수 있어 이를 빌미로 환관은 정치에도 관여를 하게 됩니다.

 사실 환관들이 중국 왕조에 끼친 악영향을 알고 있던 제1대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은 '환관은 100명이 넘어서는 안 되며, 공부를 해서도 안 된다' 고 유훈까지 남겼으나 영락제가 자신의 측근세력을 키워야 할 필요성과 정난의 변(靖難之變 : 영락제의 황위 찬탈)때 자신을 도왔던 환관들에게 보답해주고자 그들의 득세를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4대 홍희제와 5대 선덕제 때까지의 환관들은 황제의 수족 정도의 역할에 그쳤지만 주원장(朱元璋)의 유훈에도 선덕제가 내서당을 세워 환관들을 정식으로 교육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똑똑해진 환관들이 배출되어 환관에 의한 병폐는 더욱 심각해지고 맙니다.

 선덕제가 불과 38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어린 황태자 주기진(朱祁鎭 : 지금 대왕세조에 등장하는 명황제)이 아홉 살의 나이로 즉위한 것은 환관들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였습니다. 이듬해 정통(正統)으로 개원하여 제6대 정통제가 된 주기진은 홍희제의 부인인 태황태후 장씨의 수렴첨정을 받긴 했지만 장씨는 직접 정무를 보는 일을 삼가고 충신 양사기(楊士奇), 양부(楊溥), 양영(楊榮) 등 이른바 삼양(三楊)으로 하여금 정사를 돌보게 했는데요.

주기진(朱祁鎭)


 문제는 주기진(朱祁鎭)이 삼양(三楊)보다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보필하면서 스승 역할도 해주었던 왕진(王振)을 무척 신임했었는데 얼마 후 삼양이 모두 세상을 뜨자 왕진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어린 황제의 눈과 귀는 왕진에 의해서만 열리고 말죠.

 이 와중에 왕진은 사례태감되어 전지(傳旨 : 내각의 견해를 듣고 황제가 답지를 내리는 일. 그러나 선덕제 이후로 황제가 구두로 전하면 태감이 기록해 전달하는 것으로 바뀌어 환관들의 악용으로 폐해가 심각해짐)를 담당하게 되자 문제는 더욱 커지게 됩니다. 이 전지(傳旨)에 자신의 의견을 함부로 집어넣어 왕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으며 왕진을 반대하는 이들은 가차없이 죽이거나 퇴출해버린 것이죠.

 1449년, 요족(瑤族)과 묘족(苗族)이 난을 일으킨 가운데 몽골을 통일한 오이라트의 에센군이 명나라를 침공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일부 대신들은 전쟁에 반대하지만 왕진의 강력한 주장에 왕은 아무 계획도 없이 친히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방으로 진군합니다. 결국, 왕진의 잘못된 판단과 고집으로 명나라는 대패하고 주기진(朱祁鎭)은 포로가 되는 수모를 당하고 맙니다.

 주기진(朱祁鎭)이 이듬해에 석방되었으나 이미 동생 경태제(景泰帝)가 즉위하여 있었으므로, 태상황제로서 남궁(南宮)에 유폐되지만 경태제가 중병에 걸린 틈에 석형(石亨) 등의 노력으로 다시 황제로 복위하는 일에 성공하지만 환관들의 정치 간섭으로 피폐해진 명나라는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다 1644년 망하고 맙니다.

<어떤오후>
[참고 : 위키백과, 인터넷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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