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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천추태후]경종의 괴팍함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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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태조 왕건은 무차별적인 혼인 동맹으로 후비에 등재된 부인들만 29명. 그중 13명의 부인으로부터 아들만 25명을 낳았는데요. 

 경종(최철호 분)의 아버지인 4대 광종은 태조 왕건과 신명순성왕후 유씨 사이에서, 경조의 어머니인 대목왕후 황보씨(이영아 분)는 태조 왕건과 신정왕후 황보씨(반효정 분) 사이에서 태어나 이복 남매끼리 결혼을 하여 2남 3녀를 두는데 여기서 첫째아들 주가 바로 경종입니다.


 경종의 아버지인 광종은 2대 혜종과 친형인 3대 정종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쌓아 왕권을 확보하는 데 힘썼던 인물로 즉위 초에는 과감한 개혁정책을 통해서 국왕으로서의 자신감과 위엄을 과시하고 새로운 국가체제와 정치질서를 이루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만 후기에는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을 일으켜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아 고려사에서 그는 실패한 왕으로 일부에서 치부되고 있습니다.

 광종은 즉위한 지 7년이 되던 해에 왕의 전제권을 강화하고 호족과 공신세력의 특권을 억제하는 조처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는데요. 이는 원래는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선별하여 노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호족에 귀속되던 세를 국가에 환원시키고 호족의 사병을 감소시킴으로써 호족의 약화와 왕권의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지만 한편에선 노비들이 그 주인을 멸시, 배반하려는 풍조가 성행하는 문제를 낳게 되는데 이를 반대한 인물이 그의 부인인 대목왕후 황보씨였습니다만 그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대목왕후 황보씨에 대한 기록은 그녀가 태조 왕건과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나 경종을 낳았으며 호족세력을 대변해 노비안검법을 반대했다는 기록 외에 그녀의 출생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경종을 보호하다 광종의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작가의 극적 상상력일 가능성이 큽니다.>

 960년(광종 11면)에는 서사 권신이 대상 준홍·좌승 왕동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한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처음에는 권신과 준홍,왕동을 벌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광종이 순행 길에 오르는 중에 평주에서 박승위가 난을 일으켜 광종이 목숨을 잃을 뻔하자 광종은 박승위 형제를 참형에 김긍률,박영규와 역모에 가담하였던 모든 군사들을 참하고 왕권에 위협이 되는 효은태자(왕건의 15남)와 흥화군(혜종의아들),경춘원군(정종의아들)을 제거하였으며 이때 죽은 사람이 천여 명이 넘는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문제는 이때부터 참소(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고하여 바침)고 성행하여 죄없이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속출하게 됩니다. 이 여파로 호족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숙청으로 광종 자신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들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니 아들인 주(후에 경종)은 언제 목숨이 달아날까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태조가 총애하던 장수 박수경도 광종 15년에 아들들이 참소로 옥에 갇히는 통에 울화병으로 죽을 정도였으며 결국 태조의 옛 신하로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40여 명밖에 되지 않게 되죠.

  너무 많은 사람이 자신이 행한 피의 숙청으로 죽자 광종은 절들을 세우고 재물을 풀어 선업을 쌓고자 했지만 이 일 또한 건달 무뢰배들이 승려로 둔갑하여 재물을 빼돌리게 되는 결과만 낳게 됩니다.

 광종이 51세로 죽자 스무 살의 청년 주가 왕위에 오르는데 고려 제 5대왕 경종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버지인 광종에게 죽임을 당할까 공포의 나날을 보낸 후 겨우 왕이 된 경종은 왕위에 오르자 대대적인 사면령을 발휘합니다. 귀양 간 신하를 불러들이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으며 관직을 빼앗겼던 이들에게는 관직을 되돌려주었습니다. 또 호족출신인 왕선을 집정에 임명하여 호족들에 유화 정책을 폈으며 아버지인 광종 때 15년 동안 계속 되었던 공포 정치의 막을 내리게 합니다.

 문제는 경종이 임명한 왕선이 복수법이라는 것을 시행하면서인데요. 이것은 광종 대에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법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아버지인 광종 때와 마찬가지로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며 결국 왕선에 의해 태조와 천안부원 부인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효성태자,태조의 열 번째 부인인 숙목부인의 아들 원녕태자가 살해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하고 말죠.

왕실 어른이 살해당하자, 경종은 복수법을 폐하고 왕선을 귀양 보냈으며 이와 동시에 순질(筍質)과 신질(申質)을 각각 좌집정(左執政)·우집정(右執政)으로 삼고, 모두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하였습니다. 정치권력의 독주를 막고, 이를 분산시키고자 취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왕이 된 후에 벌어진 이 같은 문제로 경종은 정치를 멀리하고 오락과 놀이로 세월을 보내다가 1년도 못 가서 병이 들어 한 달 만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맙니다. 


 경종이 죽자 아직 2살이던 헌애왕후(채시라 분)의 아들 대신 왕태후의 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후는 태후가 되어 천추궁(千秋宮)에 머물게 됩니다. 성종이 죽은 후 아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여 스스로 천추궁에서 사는 자신을 가리켜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부르게 합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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