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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일지매가 청에서 만난 홍타이지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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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 방영된 "돌아온 일지매"에서 청나라로 입양 간 일지매는 우연히 홍타이지 장군(천호진 분)의 아들을 건드린 관계로 그와 대면하게 되는데요.

 홍타이지는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의 16명의 아들 중 8남으로 아버지를 이어 청나라 2대 황제로 등극한 인물로 묘호는 태종(太宗)입니다.

 드라마에서 홍타이지는 단순히 청나라로 입양을 간 일지매의 청년기를 위해서 잠깐 등장시킨 인물이 아닌 드라마상에서 청나라와 일지매와의 대결구도를 예상케 하며 나중에는 조선에 큰 치욕을 안겨주는 비중 있는 인물입니다.


 1636년(인조 14) 홍타이지는 후금으로 불리던 당시의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정묘조약을 통해 맺은 형제 관계를 폐지하고 군신 관계를 맺은 후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하라 강요하지만 인조가 이것을 거부하자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마는데요.

 병자호란에 대해 언급하려면 1627년(인조 5)에 일어난 정묘호란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것은 쇠퇴하던 명나라에 대해 이른바 친명 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에 대해 청나라가 경고를 주고자 한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조선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 채 방관하여 결국 또 한 번 청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정묘호란이 일어난 다음에 국제정세에 바르게 대처하여 청과의 외교를 가까이했더라면 병자호란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지만 인조를 중심으로 한 반정 공신들은 시대를 바로 보지 못하고 결국 죄 없는 백성만 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는 신세로 만들어 버린 것이죠.

 병자호란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바로 한반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다시 1636년(인조 14) 병자년으로 돌아갑니다. 병자년 12월 초에 태종(홍타이지)은 직접 12만의 군사로 조선을 침략했는데 이를 병자호란이라 합니다. 조선은 적을 맞아 결사항전을 했지만 청나라의 강력한 군대에 전황은 불리해져 인조는 세자와 남한산성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산성에는 겨우 만이천여명이 있었고. 먹을 것도 50일분 밖에 없었습니다.

 다음해 1월 초엔 청의 12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했으나 이때 조정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화의를 하자는 주화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그 사이 청의 군사들이 강화도로 피신했던 세손과 왕자들이 모두 잡히자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삼전동)로 나아가 청 태종(홍타이지) 앞에 꿇고 왕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숙이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추고 항복합니다.

이를 계기로 청은 조선에 강화조건을 제시합니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입니다.


 위의 "삼전도의 굴욕"에서 맺은 불평등 조약에 따라 그의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과 함께 청에 볼모로 붙잡혀 가게 되며 7년 후 고향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아버지인 인조에게 독살당하고 맙니다. <어떤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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