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왕녀자명고]호동은 그날 밤 계모를 죽여야만 했었다.

반응형
  6일 방영된 뉸 '왕녀 자명고'에서 호동왕자는 계모인 제1왕후 송매설수(성현아 분)과 한밤의 대혈전을 벌이는 데요. 여기서 호동은 지난날의 설욕을 하며 송매설수를 무릎 꿇게 하죠. 충분히 송매설수를 죽일 수 있었던 호동은 현재의 송매설수가 죽은이와 진배없기에 칼을 거두고 스승인 을두지와 함께 물러납니다.

 

 물론 이 상황은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에 불과하며 몇 살 되지 않은 호동왕자와 실제로 한밤의 활극을 벌이지는 않았겠지만 드라마에서처럼 송매설수가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이 왕이 되기 위해 호동왕자가 최대 걸림돌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죠.

실제로 대무신왕이 직접 '호동'이라 이름 지을 만큼 호동에 대한 왕의 총애는 남달랐으니 말입니다.

 만약 드라마처럼 호동과 송매설수가 혈전을 벌렸고 여기서 승리한 호동이 계모를 죽이지 않았던 게 역사적 사실이라면 역사는 이 사건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한밤의 사건은 훗날 호동의 목숨을 가져가고 폭군의 지배 아래 고구려를 혼란에 빠뜨리게 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 호동, 계모의 계략으로 자결하다

 제1 황후는 무휼이 그녀의 소생인 해우를 밀어내고 호동을 태자로 책봉할지에 대한 걱정이 대단하였습니다. 이런 차에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할 때 호동왕자가 결정적 공헌을 하자 제1 황후는 호동을 죽이기로 하고 계략을 꾸미게 되는데요. 

 제1 황후는 대무신왕(무휼)에게 호동이 자신을 욕보이려 했다고 거짓말을 고합니다. 대무신왕도 처음에 그녀의 거짓말을 믿지 않았지만 이후 집요하게 계속된 제1 황후의 이간질에 대무신완도 호동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호동에게 벌을 주려 합니다.

 이 당시 호동왕자는 낙랑을 정복하기 위한 자신의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낙랑공주를 죽인 것에 대한 심한 자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는데요.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가장 총애했던 아버지 무휼에게 마저 의심을 받게 되자 결백을 주장하며 자결해버리고 맙니다.


■ 송매설수의 아들 폭군이 되다.
 
 총애했던 호동왕자가 죽은 뒤 대무신왕은 제1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해우를 태자로 삼았습니다. 이후 대무신왕이 4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나이 어린 해우대신 대무신왕의 아우인 해색주가 왕위에 올랐는데 바로 4대 민중왕입니다.

 당시 상상을 초월하던 왕권을 소유했던 고구려에서 아무리 어리더라도 왕의 아들이 아닌 아우가 왕이 되었다는 건 아마도 민중왕과 그를 따르던 신하들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작용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따라서 민중왕에게 해우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존재 였으며 분명히 어린 해우를 심하게 견제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역사상 왕의 형제들이 그러했듯 해우또한 자신의 목숨마저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온전히 견뎌냈기에 자연스럽게 의심이 많고 조금은 모난 성격의 소유자로 자라났을 확율이 높은 거죠.

 민중왕이 재위 4년 만에 죽자 해우가 왕위에 오르는 데요. 바로 고구려 5대 모본왕으로 7대 차대왕과 함께 고구려 역사상 폭군으로 이름난 인물입니다.

 모본왕은 제1왕후의 아들이지만 이미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아버지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호동왕자로 말미암아 왕위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암투 속에서 자라야 했고 아버지가 죽은 후 삼촌인 민중왕이 보위에 있던 5년을 또 한 번 숨죽이며 살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성격은 지나치게 예민하며 의심이 많았습니다.

  모본왕이 왕이 되었을 때도 고구려는 홍수와 서리, 우박 등으로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으며 이로 인한 정세의 불안으로 의심 많은 모본왕는 역모를 두려워하며 모든 신하들과 주변 사람들을 지나치게 경계하기 시작하는 데요. 결국, 그의 성격은 포악해 졌으며 고구려사에 악명높은 군주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결국, 신하 두로(杜魯)에게 피살되고맙니다.

가상의 시나라오, 호동과 송매설수의 혈전에서 호동이 송매설수를 살려둠으로써 고구려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죠. <어떤오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