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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동이, 장희재의 최후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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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일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동이’에서는 심운택의 계략으로 장희재(김유석 분)가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이후 숙종이 보는 앞에서 청국에서 세자 고명을 앞당기기 위해 등록유초를 청국에 몰래 넘기려 했던 장희재와 그의 수하들의 추국이 시작되었습니다.

장희빈을 믿고 전횡을 일삼던 장희재의 결말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한데요.



 
조선시대, 간택되어 들어간 후궁은 대부분 권문세가 출신으로 그녀들의 친인척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했습니다. 숙종 때 남인과 장희빈에 대한 공격을 위해 서인들은 영의정 김주승의 손녀이며 김창국의 딸인 영빈 김씨를 후궁으로 들여보냈으며, 정조 후궁 원빈 홍씨는 당시의 세력가 홍국영의 누이였죠.

 이와는 달리 궁녀에서 후궁이 된 경우는 친정의 세력이 없으므로 후궁이 왕의 총애를 받는지에 따라 친인척의 세력도 좌우되었겠죠.
 
그 대표적인 예가 장녹수와 장옥정인데요.

 장녹수는 나이 30이 되었어도 용모가 뛰어나 연산군에 발탁되어 총애를 받아 오빠 복수(福壽)와 자녀를 모두 양인신분으로 올리고, 복수는 관선(官船)을 이용하여 평안도 미곡 7,000석을 무역하기도 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1506년 중종반정 때 장녹수는 참형(斬刑)에 처하여지고 적몰가산(籍沒家産)됩니다.

 장옥정은 역관으로 재력가였던 삼촌과 남인 세력의 추천으로 궁에 들어가 장렬왕후(인조의 계비)전의 나인이 됩니다. 입궐하자마자 빼어난 미모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 사실이 명성왕후(숙종의 어머니)에게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납니다.

 명성왕후가 죽자 다시 궁으로 입궐한 장옥정은 후궁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인현왕후와 갈등하게 됩니다. 당시 장옥정은 남인 세력이었고 인현왕후는 정치 실세였던 서인을 대표했기에 이 두 사람의 대립은 극에 달합니다. 하지만, 숙종과 장씨와 사이에서 왕자 균을 낳게 되고 균은 바로 원자로 책봉됩니다. 이때 세자책봉을 반대했던 송시열이 사사되는 등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는 폐위되고 서인들의 세력이 약화하기에 이릅니다.

 장희재(張希載)의 전횡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장옥정(장희빈)의 오빠였던 장희재는 숙종의 총애를 받게 되자 금군별장(禁軍別將)이 되었고, 1692년(숙종 18) 총융사(摠戎使)가 되면서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게 됩니다만 과격한 행동과 끊이지 않는 전횡 등으로 장희빈의 속을 계속 태우게 하죠.

 기사환국으로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장희재는 인현왕후를 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세자에게 후환이 미칠 것을 염려한 남구만(南九萬) 등 소론(少論)의 주장으로 제주도에 유배되는 데 그칩니다. 하지만,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무고, 저주한 사실이 밝혀져 사사(賜死)되고 맙니다.

조선왕조실록中 - 숙종 27년 9월 23일

대행 왕비를 무고한 죄인 장희재를 처형하라는 비망기를 내리다.
밤에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대행 왕비(大行王妃)가 병에 걸린 2년 동안에 희빈(禧嬪) 장씨(張氏)는 비단 한번도 기거(起居)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궁전(中宮殿)’이라고 하지도 않고 반드시 ‘민씨(閔氏)’라고 일컬었으며, 또 말하기를, ‘민씨는 실로 요사스러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취선당(就善堂)의 서쪽에다 몰래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매양 2, 3인의 비복(婢僕)들과 더불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기도(祈禱)하되, 지극히 빈틈없이 일을 꾸몄다. 이것을 참을 수가 있다면 무엇인들 참지 못하겠는가? 제주(濟州)에 유배(流配)시킨 죄인 장희재(張希載)를 먼저 처형하여 빨리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도록 하라.”하였다.

 이보 다 앞서 대행 왕비(大行王妃)가 병들어 누워 있을 때에 민진후(閔鎭厚) 형제가 입시(入侍)하니, 왕비가 하교(下敎)하기를,
“갑술년에 복위(復位)한 뒤 조정의 의논이 세자(世子)의 사친(私親)을 봉공(俸供)하는 등의 절목(節目)을 운위하면서, ‘마땅히 여러 빈어(嬪御)들과는 구별(區別)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궁중(宮中)의 사람들이 모두 다 다 희빈에게로 기울어졌다. 궁중(宮中)의 구법(舊法)에 의한다면 빈어에 속한 시녀(侍女)들은 감히 대내(大內) 근처에 드나들 수가 없는데, 희빈에 속한 것들이 항상 나의 침전(寢殿)에 왕래하였으며, 심지어 창(窓)에 구멍을 뚫고 안을 엿보는 짓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침전의 시녀들이 감히 꾸짖어 금하지 못하였으니, 일이 너무나도 한심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빌미[崇]가 있다.’고 한다. 궁인(宮人) 시영(時英)이란 자에게 의심스러운 자취가 많이 있고, 또한 겉으로 드러난 사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주상께 감히 고(告)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겠는가? 다만 나는 갖은 고초(苦楚)를 받았으나, 지금 병이 난 두해 사이에 소원(所願)은 오직 빨리 죽는 데 있으나, 여전히 다시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여 이처럼 병이 낫지 아니하니, 괴롭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때에 이르러 무고(巫蠱)의 사건이 과연 발각되니, 외간(外間)에서는 혹 전하기를,
“숙빈(淑嬪) 최씨(崔氏)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追慕)하여, 통곡(痛哭)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告)하였다.”하였다.

 드라마 '동이'에서처럼 장희재는 사람을 볼 줄 알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자세를 낮출 줄 알았던 범상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설정된 장희재는 상당히 흥미로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동이'에서 장희재로 분한 김유석의 호연은 10여 년 전 이덕화 이후 간만에 접하는 제대로 된 장희재의 모습인 거 같아 기대됩니다. <어떤오후>

<참고 문헌 : 조선왕조실록, 인터넷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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