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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동이의 첫 회임, 그 결과는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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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일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동이'에서는 폐위됐던 인현왕후가 다시금 중전의 자리에 오르고 동이와 인현왕후는 만감이 교차하는 재회를 하게 됩니다.

 또한, 숙원 책봉식을 앞두고 회임까지 하는 경사를 맞으며 동이의 앞날은 그저 순탄할 것으로만 보입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이 역사적인 동이의 첫 회임으로 태어난 아기가 훗날 영조대왕으로 묘사할 가능성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실제 역사에서 그녀의 첫 아기는 슬픔만을 어미에게 안겨주고 말죠.

 숙빈 최씨는 미천한 출생으로 그녀에 대한 기록은 숙종에 의해 후궁이 되면서부터 확인되고 그 이전의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미천한 신분을 반증하는 자료 또한 없으나 그저 무수리(상궁과 나인의 하인)로 지냈다는 구전이 거의 일반화된 사실로 전해져 올뿐이죠.

  숙종이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킨 지 6년이 지난 어느 날 궁궐을 거닐다가 불 켜진 한 궁녀의 방에서 폐비 민씨를 모셨던 무수리를 발견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는 승은을 입게 되고, 곧이어 숙원·숙의·귀인을 거쳐 숙빈 이라는 정1품의 빈까지 오르게 되니 그녀가 숙빈최씨(동이)인 것이죠.

 아무튼, 숙빈 최씨가 무수리로서 왕의 승은을 받은 것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궁녀들이 승은을 받고 후궁까지 되었으나 이후에 왕에게서 멀어져 단지 후궁의 생을 외로이 살다간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숙빈최씨를 향한 숙종의 사랑은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숙빈 최씨는 왕비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속종에게서는 왕비의 지위를 초월하는 총애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총애는 숙빈이 연잉군(훗날 영조)을 출산하자 극에 달했는데요. 숙종은 영잉군의 탄생을 크게 기뻐하며 호산청(護産廳, 왕비 미만의 후궁들이 출산할 때 출산을 돕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의 관계자들을 푸짐하게 포상하게 되는데 여기에 내구마(조선 시대에, 내사복시에서 기르던 말. 임금이 거둥할 때에 쓴다)를 하사합니다.

 물론, 왕자를 생산함에 있어 산모와 아기를 잘 보존함에 따른 포상은 당연하나 내구마까지 포함된 포상의 범위와 액수는 지나침에 많은 관료가 이를 막았지만, 숙종의 결단을 꺽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연잉군(훗날 영조)이 진사 서종제의 딸과 혼인 시 그 사치는 실록에 기재될 만큼 도를 넘었으며, 후궁의 소생에 지나지 않는 영조의 가례가 세자의 가례를 초월할 정도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것은 당장 이해가 가지 않은 부분이 틀림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때 이미 원자에 이어 세자로 책봉된 장희빈 소생인 왕자(경종)이 있는 상황에서 숙빈최씨의 자식에 대한 예우를 그리했던 것은 그만큼 그녀에 대한 일관적인 숙종의 사랑을 반증하는 것이죠.

 하지만 숙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에게도 아픔은 있었는데요.

 숙빈 최씨는 1693년에 첫아들을 낳았으나 바로 죽는 슬픔을 겪었고, 다음해인 1694년(숙종 20) 9월에는 영조대왕이 되는 아들 금(연잉군)을 낳습니다.

 이후 2년 뒤인 1696년에 다시 왕자를 출산하지만, 이 왕자마저 바로 죽는 슬픔을 겪습니다.

 슬하에 연잉군(영조)를 포함하여 3남을 두었지만 연인군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으니 아무리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해도 두 명의 자식을 잃은 어미의 마음으로 평생을 살기에는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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