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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대왕 세종]충녕이 함길도 경성에서 만난 최윤덕과 이천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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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충녕대군은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경성에 유배된 적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드라마에서 역사에도 없는 기발한 설정을 하게 된 이유는 첫째, 양녕이 폐위되는 원인을 제공하기 위한 또 하나의 이야기가 필요해서고 둘째, 세종시절 가장 신임받았던 두 인물과의 처음 만남을 풀어내기 위한 작가의 미봉책인 듯싶네요.


충녕이 함길도 경성에서 만난 최윤덕(德)과 이천(蕆,)을 소개합니다.





☞ 무관 출신이 정승이 되다. 축성(築城)대감 최윤덕(德)

 고려말~조선 초의 명장 최운해(雲海)의 아들인 최윤덕은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국경의 수비에 나가 있어 한마을에 사는 양수척(楊水尺:고려의 천민 계급, 후에 백정으로 불려짐)에 의하여 양육됐습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사용한 최윤덕은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쏘아죽인 유명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아버지를 이은 장군감으로 명성이 대단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청렴하여 여가를 이용하여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고,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그 호랑이를 잡아 배를 갈라 남편의 뼈를 찾아 장사를 지내게 해 주는 등 백성을 끔찍이 생각하는 군주로서의 품성까지 두루 갖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태조3년 회시(會試)에 합격하고, 2년 뒤 부친을 따라 영해 반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는 전공을 세워 정종 2년 훈련원 부사직에 제수되었으며, 태종 3년에 대호군으로 승진하였고, 부친의 상중임에도 기복(起復 : 3년 시묘를 끝내지 못하고 왕의 부름을 받음)의 명을 받을 정도로 드라마에서처럼 변방방어에는 최고의 전문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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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원년에 삼군도절제사가 되어 이종무와 함께 출병 15일 만에 대마도를 정벌했던 최윤덕은 세종 15년에 북벌을 총지휘하여 여진족을 토벌한 공으로 무신으로서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당시 그는 무관이 재상이 오르는 것이 옳지 않음을 왕에게 사직상소를 통해 사양의 뜻을 표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던 점을 볼 때 세종이 그에게 주는 신임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율곡의 십만 양병설에 앞서 왜국의 침략을 예견하였고 나라가 평안할 때 전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축성(築城)의 필요성을 왕께 진언하여 압록강 부근의 4군을 개척하였으며, 하삼도(下三道:충청,경상,전라도)의 왜구 침략에 대비한 군사 요충지에 성을 쌓는 등 축성대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성 쌓는 일에 주력하는 등 조선 초 국방의 기초를 다진 명장중의 명장이었습니다.


☞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천(蕆,)

  이천은 장영실과함께 조선시대 과학 중흥기를 지휘했던 인물입니다.
노비출신의 장영실과는 달리 권문세가의 자손이나 고려말 그의 외가인 염씨가문이 비리에 연루되어 최영과 이성계에게 모두 도륙당할 때 그와 동생만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무예에 뛰어났던 그는 태종 2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그 재능을 인정받아 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천재적인 과학적 자질을 겸비하여 병마절도사 시절 세종의 눈에 띄어 공조참판(지금의 과학기술부 차관)에 임명되어 금속활자를 만드는 국가적 대업을 훌륭히 수행하였구요. 특히 천문학 부문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는데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현주일구, 쳔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등이 모두 그의 지휘를 거쳐 탄생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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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무관을 겸임하여 최윤덕과 함께 압록강 부근의 4군을 개척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한 그는 장영실과 출신성분이 달랐음에도 각별한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는데요. 이천이 없었다면 장영실도 없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영실이 이루어낸 거의 모든 프로젝트의 지휘를 맡았던 인물로 세종의 업적 중 특히 과학기술분야가 후세에게 큰 귀감이 된것에는 이천의 뛰어난 과학적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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