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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나무, 광평은 20세에 굶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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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방송된 SBS 수목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채윤(장혁 분)은 밀본에 의해 납치되던 소이(신세경 분)와 광평대군(서준영 분)을 구하는 숨막히는 장면들이 연출되었습니다.

여기서 세종의 대의를 공격하는 채윤에게 광평대군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내기를 제안하는데요. 바로 세종이 광평대군의 목숨과 글자 중 무엇을 택하느냐에 대한 내기였습니다.

 이 과정속에서 광평대군과 있으며 채윤은 한글의 실체에 대해 알게되고 채윤은 광평대군과 소이를 데리고 이도앞으로 가게 됩니다.


 이처럼 채윤이 이도(한석규)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그의 수하가 되기까지는 이도의 아들 광평의 역할이 크게 작용을 하였습니다.

 광평대군은 세종의 다섯째 아들로 1432년(세종 14) 광평대군으로 봉해지고 1436년에 신자수(申自守)의 딸과 혼인하였습니다.


 그 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에 힘써 『효경』ㆍ『소학』ㆍ사서삼경ㆍ『좌전(左傳)』 등에 능통하였고, 『문선(文選)』과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 등의 문집을 읽고 국어ㆍ음률ㆍ산수에도 밝았다. 1437년 방번(芳蕃,태조의 일곱째 왕자)에게 입양하여 후사(後嗣)가 되었습니다.

 경도 종성 경재소를 맡아, 북변 국방강화, 풍속 교화에 힘썼던 광평은 사서삼경에 능통했고, 국어·음률·산수에도 밝았으며, 총명 효제하고, 서예, 격구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안타깝게 그는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게되는데 야사에서 전해지는 그의 사인은 놀랍게도 아사(餓死,굶어 죽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일화를 소개합니다.
 세종대왕은 다섯번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운명에 대해 신분을 숨기고 점을 보게 하였다. 점쟁이는 점을 치는 대상이 광평대군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점을 쳤는데,그 결과「이 사람은 젊은나이에 못 먹어서 굶어 죽을 운명」이라고 예언하였다. 세종대왕은 얼토당토 않은 예언이라고 생각했다.

세종대왕은 『임금의 아들이 어찌 굶어 죽겠는가?』라고 하면서 역시 점을 치는 것은 미신일 뿐이라고 웃었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광평대군에게 사고 팔 수 없이 영원히 유지되는 땅에 대한 권리를 내려서 결코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제도를 마련해 주었다.

1444년. 20세의 광평대군은 어느날 밥을 먹다가 생선가시가 목에 걸리게 되는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 가시를 뽑을 수가 없었다. 결국 광평대군은 목에 걸린 가시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굶어 죽었다.

한편. 조선 건국초에는 복진(卜眞)이라는 사람이 여러가지 주술을 쓰는데 능했다. 복진이 스스로 점을 쳐보니, 자신이 죽을 날짜를 알게 되었고, 또 점을 쳐 보니, 자신의 목숨은 임금에게 달려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복진은 임금에게 찾아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사정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궁궐 속으로 들어가 임금이 있는 곳 까지 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복진은 둔갑술을 여러가지로 연구하고 연습해서 마침내 몸을 숨기고 궁궐 속을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복진은 열심히 몸을 숨기는 방법을 연습해서 자신이 죽을 날짜가 다 와서야 겨우 몰래 궁궐 속으로 숨어 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복진은 몰래 임금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임금에게 목숨이 달려 있음을 말하고 도움을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임금은 복진을 보자 깜짝 놀라더니,

『몸을 숨기고 궁궐을 침범해 깊은 곳까지 들어 왔으니, 죄가 무겁고, 참으로 위험하다.』 라고 하고는, 궁궐 속에 몰래 침범한 죄로 복진을 붙잡아 그 날로 사형시켜 버렸다.
 
 평범한 백성의 신분이 아닌 왕족이 굶어죽었다는건 앞서 언급했듯이 누군가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실록에는 그의 사인이 아사(餓死)가 아닌 창진(瘡疹,천연두)라고 언급이 되어있습니다.
* 세종 106권, 26년(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년) 12월 7일(임자) 1번째기사

광평 대군 이여(李璵)가 졸(卒)하였다. 여의 자는 환지(煥之)이고 호는 명성당(明誠堂)이니, 임금의 다섯째 아들이다. 홍희(洪熙) 원년 을사(乙巳) 5월 임신일(壬申日)에 나서, 선덕(宣德) 7년 임자(壬子) 정월에 광평 대군에 봉하였다. 나이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서 《효경(孝經)》과 《소학(小學)》과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다 통하고, 《문선(文選)》과 이태백(李太白)·두자미(杜子美)·구양수(歐陽修)·소동파(蘇東坡)의 문집들을 두루 열람하였고, 더욱 《국어(國語)》와 《좌전(左傳)》에 공부가 깊었으며, 음률(音律)과 산수(算數)에 이르기까지도 그 오묘(奧妙)한 이치를 다 알았다. 글을 잘 짓고 글씨의 필법도 절묘하였으며, 강한 활을 당겨서 멀리 쏘고, 또 격구(擊毬)에도 능하였다. 임금이 간의대(簡儀臺)와 종부(宗簿)의 일을 총관(總管)하기를 명하였더니, 종합하고 정리함에 체제를 세웠었다. 임금이 무안군(撫安君)의 후사(後嗣)가 없음을 추념(追念)하여 입후(立後)를 시켜서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여(璵)가 창진(瘡疹)을 앓고 있었는데, 임금이 심히 근심하여 여러 방법으로 치료를 했으나 끝내 효과를 얻지 못하고 죽으니, 임금과 중궁이 몹시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거두었다. 여는 성품과 도량이 너그럽고 넓으며, 용모와 자태가 탐스럽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효제(孝悌)하여 비록 노복이나 사환이라도 일찍이 꾸짖지 아니하매,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였다. 시호(諡號)를 장의(章懿)라고 하였으니, 공경하고 삼가고 높고 밝음이 장(章)이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현명하고 착함이 의(懿)이다. 아들이 하나이니 이름은 이부(李溥)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처럼 이도는 광평을 무척이나 총애하였던 것이 사실이 듯 보입니다. 다음은 실록에 등장한 광평대군 사후의 세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세종 106권, 26년(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년) 12월 7일(임자) 1번째기사

처음 여(璵,광평)의 병이 위독할 때 임금이 밤을 새워 자지 않았고, 끝내 죽으매 종일토록 수라를 들지 아니하니, 도승지 이승손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오랜 병환이 있으신데 애통하심이 예절에 지나치십니다. 청하옵건대, 수라를 드시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마땅히 그리 하겠노라.』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서야 죽만 조금 마실 뿐이었다. 백파령(白波令)에게 명하여 상례를 주관해 보게 하고, 첨지중추원사 정척(鄭陟)과 변효문(卞孝文)·예빈 소윤(禮賓少尹) 민완(閔瑗)으로 호상(護喪)하는 일을 시키고, 또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사초(李思招)를 명하여 또한 가서 보살피게 하고, 초상 중에 목욕과 염습(斂襲)과 빈소(殯所)에 관한 제구(諸具)를 다 관(官)에서 마련하였다. 정부와 육조에서 조위(弔慰)하는 전문(箋文)을 올리니, 이르기를,

『온화하고 순량한 숙덕(夙德)이 일찍이 종실(宗室)의 꽃부리었더니, 준수하고 풍우한 자태가 문득 황천의 막힘이 되었나이다. 슬픔이 깊이 대궐에 감싸이매, 아픔이 널리 민심(民心)에 맺히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성상의 비통하심을 너그러이 하시어 신하들의 소망에 답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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