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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미실 때문에 몰락한 3인의 화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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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에는 대원신통이라는 '왕에게 색을 제공하는 전문여성집단'이 있었는데 미실또한 이 집단의 일원으로 할머니인 옥진으로부터 방중술을 배워 3명의 임금(진흥왕, 진지왕, 진평왕)과 태자(동륜)등을 유혹하여 왕실을 좌지우지하였습니다.

[대원신통] 왕 등과의 혼인을 하는 여자를 공급하는 계통으로 인통(姻統)이라고 한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인통은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있다. 대원신통은 보미를 시조로 하였으며 진흥왕의 황후였던 사도 사도의 조카였던 미실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인통의 계승은 완벽하게 모계 계승으로 이러졌는데 남자들은 한 대에 한하여 어머니의 계통을 따라 대원 신통이 되기도 하였다. 대원 신통은 화랑도 중 화랑과 낭도의 파를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 다음 백과사전-

그것도 모자라 미실은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4명과도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요. 이들 모두 결국은 천하의 요부의 미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되죠.




미실에게 버림받은 4인의 풍월주 中 사다함, 세종, 설원랑 3인을 소개합니다. 먼저 1대~10대에 걸친 풍월주들을 알아봅니다.
1대 위화랑(魏花郞) (? - ?, 풍월주 540년 - ?)
2대 미진부공(未珍夫公) (? - ?, 풍월주 ? - 548년)
3대 모랑(毛郞) (? - ?, 풍월주 548년 - 555년)
4대 이화랑(二花郞) (? - ?, 풍월주 555년 - ?)
5대 사다함(斯多含) (547년 - 564년, 풍월주 ? - ?)
6대 세종(世宗) (? - ?, 풍월주 ? - ?) : 독고영재 분 (미실의 남편)
7대 설화랑(薛花郞) 또는 설원랑 (? - ?, 풍월주 ? - ?)  : 전노민 분 (미실의 정부)
8대 문노(文弩) (? - ?, 풍월주 ? - ?) : 정호빈 분 (화랑의 전설로 국선으로 불림) 
9대 비보랑(秘宝郞) (549년 - ?, 풍월주 582년 - 585년)
10대 미생랑(美生郞) (550년 - 609년, 풍월주 585년 - 588년) : 정웅인 분 (2대 미진부의 아들,미실의 남동생)

■ 비운의 풍월주, 사다함                                                                          

  사다함의 형제로는 토함공과 새달 그리고 동모이부인 설원랑(전노민 분)이 있었습니다. 사다함은 덕이 많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으니 4대 풍월주인 이화랑은 사다함을 지소태후(진흥왕의 어머니)에게 천거하였습니다.

 561년 가야국내에서 영토분쟁이 일어나자 사다함은 태종에게 선봉에 설 수있게 청했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거부당합니다. 하지만 사다함은 몰래 가야국으로 가서 내분을 정리하고 돌아옵니다.이에 진흥왕이 공을 기려 많은 땅과 포로들을 주었으나. 사다함은 땅은 아랫사람에게, 포로는 양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사다함을 아끼던 이화랑은 사다함을 5대 풍월주로 삼고, 설원랑을 부제로 삼았으며 사다함이 죽음에 임하여서는 이화랑을 붙잡고 세종이 풍월주가 되기를 부탁하죠.

 이런 사다함의 훌륭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에는 항상 두개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는데요. 하나는 금진이요, 또 하나는 미실이었습니다. 금진은 처음 법흥을 섬겼고, 뒤에는 구리지와 관계를 가졌으며 그녀의 이러한 색정은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설성으로까지 이어졌다합니다. 심지어 평소 사다함을 존경하여 그의 뒤를 따른 무관랑에게 까지 손길을 보내니 금진과 관계를 가졌던 무관랑은 담장(월성의 궁장)을 넘다가 구지(월성해자)에 빠져 죽고 맙니다. 어릴 때 무관랑(武官郞)과 우정을 맺어 죽음을 같이 하기로 했는데, 무관랑이 이처럼 허무하게 죽자 사다함도 7일 동안 통곡하다가 17세에 죽고 맙니다.

 그리고 사다함은 평소 미실을 좋아하였는데요. 미실 또한 사다함을 좋아하였지만 사다함이 가야정벌을 간 사이 지소 태후(진흥왕의 어머니)가 미녀들을 궁중에 모아놓고 아들 세종 전군(殿君·왕이나 태후의 아들)에게 부인을 고르라고 했을 때 세종이 미실을 선택하여 미실은 세종의 아내가 됩니다. 미실의 혼인은 사다함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며 사다함의 죽음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무관랑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미실에 버림받은 충격으로 죽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 미실의 남편, 세종                                                                                      

 세종은 태종과 지소(진흥왕의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지소 태후(진흥왕의 어머니)가 미녀들을 궁중에 모아놓고 아들 세종 전군(殿君·왕이나 태후의 아들)에게 부인을 고르라고 했을 때 세종이 미실을 선택하여 세종은 미실과 부부의 연을 맺게되죠. 

 미실에게 모든것을 빼앗긴 세종은 본처를 차비로 미실을 본처로 바꿔달라는 미실의 청을 수용하였으며 동태자의 죽음 후 원화의 폐지 때 보여준 세종 또한 풍월주라 하기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많이하게 됩니다.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에게 색을 팔며 자신외에 다른 풍월주와의 부적절한 관계 또한 세종은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미실에 대한 사랑은 한결 같았습니다. 하지만 미실의 모든 것을 따른 것이 아니라. 미실이 체통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간언을 하였으니 세종은 안으로는 아녀자의 뜻을 따르고 때로는 간언하였던 것입니다.

  이외에 세종은 드라마와는 달리 문노(정호빈 분)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미실의 권유로 대원신통인 사도태후를 섬겼으나 미실, 사도와 함께 진지왕 옹립 그리고 폐위 사건에 주도적인 역활을 하여 신라를 큰 혼란에 빠뜨리게 합니다.

■ 미실의 병까지 가져간, 설화랑                                                                          

 설원랑으로도 불리며 사다함, 토함공과 더불어 동모이부관계입니다. 설원랑은 3대 풍월주 모랑의 처 준화를 미실의 권유로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준화와 모랑사이에서 태어난 준모와 혼인하여 딸 미모(美毛)를 낳습니다. 마지막으로 미실과 관계를 가져 16대 풍월주 보종공을 낳는 그야말로 여색을 밝혔던 인물입니다.

 진흥왕대에 미실이 원화를 다시 부활시키자, 세종을 상선, 문노를 아선, 설원랑과 비보랑을 좌 ,우봉사화랑으로, 미생을 전방봉사화랑으로 삼았는데 동륜태자의 죽음으로 미실이 원화를 그만두게 되자. 세종이 다시 풍월주가 되었고 미실은 세종에게 같이 정계일선에서 물러나기 청하였습니다. 이에 세종은 설원랑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넘겨주고 미실과 더불어 여생을 보냅니다.
[원화源花] 신라 때에, 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질서를 익히며 예절과 무술을 닦던 청소년 단체. 화랑(花郞)의 전신(前身)으로서, 진흥왕 때 귀족 출신의 처녀 두 명을 뽑아 단체의 우두머리로 삼고 300여 명의 젊은이를 거느리게 하였으나 서로 시기하는 폐단 때문에 폐지하고 남성을 우두머리로 하는 화랑으로 바꾸었다.

 낭도들은 설원랑을 가문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잘 따르지 않아 잦은 잡음을 내고있었는데요. 미실의 도움으로 이 문제는 일시적으로 가라앉게 할 수 있었지만 이는 얼마지나지 않아 문노파와 대립각을 세우게 됩니다.

 설원랑과 문노의 재주를 저울질을 한 미실은 문노 쪽이 뛰어남을 알고 문노를 선도(仙道)의 스승으로 삼는 다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 이면에는 미실의 고단수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었습니다. 문노를 스승으로 삼자, 설원랑과 미생 등에게 문노를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설원랑이 복종하자. 문노의 도 또한 설원에게 복종하였으며 미실이 풍월주의 지위를 문노에게 넘겨주기를 명하게 됩니다.

 여기서 미실의 정치력이 발휘되는데요. 화랑의 법에는 후계자가 전주(殿主)에게 하배를 올리고 칭신(稱臣)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이 법도를 따라 문노는 설원랑에게 칭신하지 않을 수 없었죠. 미실은 바로 이러한 점을 생각하여 문노를 스승으로 그리고 풍월주로 삼게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설원랑을 위하여 미실이 움직여 주자 그는 미실이 병들어 고생하자 미실 옆에서 병 간호를 하였으며 심지어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고자 하는 기도를 밤마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설원랑은 미실의 병을 대신하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으니 이때 설원랑의 나이 58세였습니다. <어떤오후>

[출처]
 - 다음 백과사전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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