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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천추태후와 같은 여전사 실제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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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대하사극 '천추태후'에서 후에 천추태후가 되는 황보 수(채시라 분)의 활약이 대단한데요. 1차 침입 시 안융진성에서 보여준 그녀의 가공할 만한 무예와 기상은 아무리 남녀차별이 덜했던 고려시대였지만 왕족의 귀한 몸으로 저렇게 직접 전장에 나가 싸울 수 있었던 게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고려시대에는 유교적 윤리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밖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가정에서는 남녀가 평등하여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었고 재산을 아들과 동등하게 상속받을 수 있었으며 집안의 호주가 되는 것도 가능한 시대였던 것입니다. 이는 성리학이 완전히 정착되기 전인 15세기까지도 이어졌고 16세기 사림이 득세하여 남녀유별사상이 나오기 전까지 지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혼하거나 재혼한 여성에 대해서도 차별을 두지 않았던 고려시대라도 여성의 사회적 진출은 그리 자유롭지 않았기에 천추태후와 같은 여성 무사의 활약은 어찌 보면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판단됩니다.


■ 천추태후와 같은 여전사 실제 있었나?                                                                   

 하지만, 이런 시대에도 더군다나 거란의 고려침입의 최고 절정이었단 이른바 '거란의 3차 침입'시 우리의 영웅 강감찬 장군과 함께 거란의 혼을 빼앗았던 여장부가 있었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전장에 핀 꽃, 설죽화(雪竹花)입니다.

 설죽화는 앞선 포스트에서 다뤘던 인물 '거란의 제2차 침입'시의 수훈장 양규의 부대에서 평민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사망한 이관(李寬)의 딸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란 1차침입에서 사망했다는 설도 있슴)

 따라서 본명은 이설죽화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름을 풀이하면 '눈 속에 핀 푸른 대나무 꽃'이라는 뜻으로 이름보다는 별칭일 가능성이 높은거 같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가서 전사한 이관의 품에는 아래과 같은 시가 적힌 편지가 발견되었는데요.
이 땅에 침략 무리 천만 번 쳐들어와도 
고려의 자식들 미동도 하지 않는다네
후손들도 나같이 죽음을 무릅쓴 채 싸우리라 믿으며 
나 긴 칼 치켜세우고  이 한 몸 바쳐 내달릴 뿐이네

 이 편지는 우여곡절 끝에 그의 아내 홍씨 부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남편의 편지를 읽은 홍씨 부인은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한 남편의 유언과도 같은 시처럼 아비의 대를 이어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고 싶었지만 하나 있는 자식은 딸이었기에 홍씨 부인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미의 한탄을 곁에서 지켜본 설죽화(雪竹花)는 아비의 유언대로 전장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무관집안의 딸로 무예가 출중했던 어머니 홍씨 부인에게 무예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설죽화(雪竹花)의 기량은 하루하루 발전해 나갔으며 급기야 주변에서 그녀를 상대할 자는 없었습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설죽화(雪竹花)는 드디어 전쟁터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긴 여정을 떠나는데요. 이때가 거란의 3차 침입이 막 시작 되려 하던 때였습니다.

 남장을 하고 그녀가 찾아간 곳은 바로 강감찬 장군의 부대였습니다. 강감찬은 그녀가 여자인 줄은 몰랐으나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그녀를 받아주려 하지 않자 설죽화(雪竹花)는 아비의 유언을 강감찬에게 얘기하며 그녀의 무공을 그 자리에서 자신 있게 보여줍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 할만큼 뛰어난 창검술과 그녀의 기상에 감탄한 강감찬은 그녀를 자신의 부대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이후 그녀는 수많은 전장에서 거란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대 활약을 하게 됩니다.

 1018년 12월 소배압이 거란군 10만을 강감찬이 귀주에서 대파하고 다음 달인 1019년 1월 설죽화(雪竹花)는 퇴각하는 거란군의 퇴로를 막고 마지막 혈전을 벌입니다.  하지만 계속된 거란의 공격에 설죽화(雪竹花)는 점차 지쳐가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거란의 쏟아내는 수많은 화살을 몸에 맞고 장렬히 전사하고 맙니다.

 설죽화(雪竹花)가 전사한 후에야 비로소 강감찬은 그녀가 남장한 소녀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녀의 품에서 발견된 아비 이관(李寬)의 시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맙니다.

 강감찬은 설죽화를 고려의 꽃이라 칭하고 임금에게 아뢰어 공신의 칭호를 내리게 하였으며 설죽화가 무예를 익혔던 자리에 사당을 지어 그녀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설죽화(雪竹花)의 이야기는 역사서가 아닌 설화로 전해져 오는 것으로 그녀가 실존인물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고려시대, 거란과의 그 긴 고통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백성의 노력과 희생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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