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비운의 세도정치가 홍국영의 4년 천하



  홍국영은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 등이 포진되어있는 외척세력 풍산홍씨의 일문이었으나 그의 아비가 그다지 정치에 관심이 없던 터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드라마 초반에서 보이는 홍국영의 행태처럼 그의 청년기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넉넉지 못한 환경 탓에 공부에 전념하기 어려웠을 테니 과거급제도 힘겨워지지 않았을까 싶네요. 실제로 문헌에는 그가 지닌 지적 역량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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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강원 설서의 초라한 관직을 벗어나기엔 너무나 내세울 것 없었던 그가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 서게 되는데요. 바로 정조와의 만남입니다. 당시 정조는 홍인한, 정후겸이 포진된 벽파세력으로 부터 목숨까지 위협을 받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시절로 홍국영의 충성심과 비범함은 자신을 막아줄 유일한 방패라고 여기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벽파의 음해와 위협을 잘 견뎌낸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의 출세가도엔 탄력이 붙게 됩니다. 동부승지에서 도승지와 숙위대장 겸업, 이조참의, 대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등의 요직을 파직될 때까지 두루 거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출세보다도 더 큰 세도를 누릴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왕의 외척이 되는 것이죠. 정후겸을 포함한 벽파세력을 피로 처단시킨 홍국영은 서서히 왕의 장자방으로 안주해있길 거부하고 개인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활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왕비인 효의왕후 김씨에게 후사가 없는 틈을 타 자신의 누이를 후궁으로 입궐을 시키는데 바로 원빈(元嬪)입니다. 여기서 원빈의 ‘원()’자는 근본이라는 뜻으로 왕위계승권을 잇는다는 의미가 있어서 후궁은 사용할 수 없는 용어로 당시 홍국영의 입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좋은 예라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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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안타깝게도 입궁 1년 후 왕비와 첨예한 대립관계를 보이던 원빈도 후사를 보지 못하고 죽게 되는데 외척이 되려 했던 그의 야망은 일단 수포로 돌아가지만 홍국영은 포기하지 않고 또 한 번 외척을 꿈꾸게 되는데요.

  바로 은언군(정조의 이복 형제)의 아들 담()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으로 했다가 다시 상계군(常溪君)으로 개봉, 세자로 책립하게 함으로써 또 한번 외척으로 집권하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홍국영은 상계군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역모죄를 씌워 유폐시켜버리고 맙니다. 홍국영은 이 사건과 연루되어 결국 파직하게 되는데요.

 
이 사건을 "상계군의 옥"이라 칭하는데 다른 시각에서는 이즈음 정조가 계획했던 정계구상이 거의 마무리단계에 들어서자 평소 권력을 남용하던 홍국영을 이 사건과 연루시켜 제거하려 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권력싸움에 의한 파편으로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잃고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온 터라 자신 외에 또 다른 세도가가 존재하는걸 방종했을 리 없을 테니 말입니다.

 
상계군의 옥으로 수많은 파직상소를 감당해내지 못한 정조는 홍국영에게 파직을 권하고(홍국영의 목숨만은 보존하여 했던 정조의 배려인 듯) 홍국영은 그 뜻을 받아들여 은퇴를 하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는 후폭풍에 휘말려 끝없이 추락하고 마는데 왕비인 효의왕후 김씨 독살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원빈이 죽은 후 급속히 궁궐엔 독살 설이 퍼지게 되는데 이 소문의 표적은 곧바로 중궁전으로 향하면서, 효의왕후뿐 아니라 혜경궁을 비롯한 궁궐 내의 세력들과도 적대관계가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효의왕후를 독살시키려 했다는 죄를 뒤집어 쓰고 가산을 모두 빼앗긴 채 유폐되어 이듬해 사망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33세 살로 오로지 정조 한 사람만을 믿고 군림하려던 4년 천하는 허무하게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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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폐된 지 1년 만인 33살의 젊은 나이에 급사한 이유가 권력의 최고에서 군림하다 허무하게 추락한 것에 대한 허무함과 목숨을 버릴 각오로 충성을 바쳤던 주군으로부터 버림받은 배신감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술로 보내다 화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답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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