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 세종]에서 세종의 외척을 제거하기 위한 태종(이방원)의 계획에 결국 장인인 심온(沈溫)은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하는데요. 태종의 명을 받고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던 박은과 조말생은 심온의 딸이자 왕비인 소헌왕후를 그대로 두면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기에 역적의 여식이니 폐위를 내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과연 소헌왕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내명부를 가장 잘 운영했던 최고의 왕비였습니다. 처음부터 왕비가 되기 위한 간택령을 통해 입궐했던 다른 왕비들과는 달리 태종의 셋째아들인 충녕에게 시집온 후 첫째인 양녕이 폐세자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셋째인 충녕이 왕이 되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국모가 되는 운명를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국모’의 자리는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가고 마는데요.
첫째, 아비인 심온(沈溫)이 뒤집어쓴 반역죄로 말미암아 친정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맙니다. 앞서 얘기했던 심온에 관한 글에서 처럼 외척의 세도를 병적으로 경계했던 태종의 음모로 그녀의 가문은 풍비박산이 나고 그녀 또한 태종이 죽은 후에 복수를 당할까 우려했던 박은, 조말생들의 주장으로 폐서인 될 위기에 처하는 데요. 뜻밖에도 소헌왕후의 처벌을 반대한 사람은 태종이었습니다. 세종과 금슬이 아주 좋고, 내조의 공이 많은 데다 많은 자손을 생산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태종에게 있어서 소헌왕후는 아주 흡족한 며느리였던 것 같습니다.
둘째, 오직 혼자만이 독차지할 거라 굳게 믿었던 지아비의 사랑을 다른 여인들과 나누어야 했습니다. 소헌왕후와 세종 사이에는 무려 8남 2녀의 자녀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두 사람의 금슬이 대단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비 심온(沈溫)의 옥으로 말미암아 폐서인 될 위기에서 구해준(?) 태종과 원경왕후는 소헌왕후를 내치는 대신 세종에게 왕비 이외의 다른 여인들을 들여 또 다른 자손들을 생산할 것을 요구했느데요. 이는 개국한 지 50년이 채 되지 않는 불안정한 나라 조선의 왕비가 받아들여야 할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도 했습니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요청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세종은 이후 여섯 명의 후궁에게서 모두 10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요. 이러한 자신의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소헌왕후는 세종의 후궁들을 투기하지 않으며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후궁과 왕실 종친들의 존경을 받는 한편 세종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었었니 그야말로 조선시대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평온한 왕실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평생을 절제하고 인내해온 그녀를 한없이 무너뜨린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바로 두 아들의 연이은 죽음이었습니다. 다섯째인 광평대군이 20세로 요절한 이듬해 일곱째 평원대군마저 18세로 사망하는데 이는 세종의 신병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소헌왕후의 생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두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인한 고통으로 몸져누운 소헌왕후는 이듬해 1446년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맙니다.
3년 뒤 세종은 평생 눈물과 한을 삼키며 불법에 의지해 살아갔던 부인을 위해 찬불가를 손수 지어 그녀의 명복을 빌었는데요. 이것이 바로 훈민정음으로 쓰인 한국 최고(最古)의 가사 ‘월인천강지곡’이었습니다.
'월인천강지곡’이 탄생한 지 1년 뒤인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그녀는 세종과 함께 합장 되는데 조선 최초의 합장릉 영릉(英陵)인 것입니다. <어떤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