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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대왕세종]동성애를 즐긴 세자빈 봉씨의 최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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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은 1414년(태종 14년)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8세 되던 해인 1421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무려 29년동안 왕세자로 있었던 인물입니다. 오랜기간의 격무와 지병으로 세종은 문종이 29세 되던 해인 1442년부터 섭정을 맡겼는데 원래 병약했던 문종은 세종이 승하하기까지 8년간의 섭정으로 인해 왕이 된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병석에서 보내야만 했으며 2년 3개월의 짧은 재위기간을 끝으로 세상을 등진 비운의 인물이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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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은 8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기에 혼인도 일찍 하였는데요. 첫 번째 빈궁으로 김씨, 두 번째로 어제 방영된 드라마에서 재혼상대로 등장한 봉씨가 있었으나 둘 다 과실이 있어 폐서인되었고 이 당시 양원에 진봉되어 있던 권전의 딸이 세자빈으로 정해졌는데 바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입니다.

<양원 :조선 시대에, 세자궁에 속한 종삼품 내명부의 품계.>


☞ 세자를 곁에 두려고 압승술(壓勝術)을 사용한 휘빈 김씨

 첫 번째 휘빈 김씨는 세자보다 연상으로 이미 그녀의 몸과 마음은 성숙한 여인이었습니다. 정열적인 휘빈은 세자의 정열을 북돋아 주기에 골몰하였지만 희빈을 통해 여자를 처음 느껴본 세자는 육체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고 이때부터 궁녀들의 모습, 걸음걸이와 심지어는 치마 속의 육체까지도 상상하며 관능미 넘치는 궁녀의 뒤를 따랐다 합니다.

이렇게 되니 자연히 휘빈 김씨의 처소에는 발길이 뜸해지고 원래 나약했던 세자는 날이 갈수록 더욱 약해져 갔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한 휘빈은 시녀들과 세자를 끌어들일 여러가지 궁리를 하게 되었는데요.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압승술(壓勝術)이었습니다.

압승술은 남편이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 뒷굽을 태워 가루를 내고 나서 그것을 술에 타 남편에게 먹이는 일종의 미신인데요. 휘빈은 세자가 자주 출입하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의 술이나 차에 섞어 마시게 하거나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만들어 먹이는 등 세자를 곁에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되지만 당연히 이 모든 일은 허사가 되고 오히려 그녀의 행각은 탄로 나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 세자빈 김씨는 폐서인이 되어 친가에 내쫓기게 되었으며 그런 여식을 부끄럽게 여긴 아버지 김오문은 딸과 부인을 비상으로 자결케 한 후 자신은 무관답게 배를 갈라 최후를 마쳤다 합니다.


☞ 세자에게서 얻지 못한 욕구를 동성애로 해결한 순빈 봉씨
 휘빈 김씨가 퇴출당한지 얼마 못가 새로운 세자빈으로 종부소윤 봉려의 딸이 간택되었는데 바로 순빈 봉씨였습니다. 세자와 동갑이었던 순빈은 몸집도 작고 유약했지만 보기와는 아주 달리 색을 밝히는 음탕한 여자였다 전해집니다. 휘빈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병약한 세자는 봉씨의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봉씨와의 관계는 멀어졌고 이런 와중에 궁녀 중 한 여인이 세자의 아이를 잉태하는 일이 생기고 마는데요.바로 이 여인이 단종의 어머니 양원권씨입니다.

 양원 권씨의 회임소식을 듣고 자신의 입지에 위기감을 느낀 순빈 봉씨는 자신 또한 회임하였다 거짓을 꾸몄으며 의기양양해진 순빈은 양원 권씨에게 함부로 회초리를 드는 등 투기를 부리다 이후 거짓 회임이 들통나려 하자 아이를 유산하였다는 거짓말을 하는 등 본바탕이 그리 온화한 인물은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벌려논 순빈의 행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는데요.

  세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던 세자빈 봉씨는 세자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에게서 세자에게서 충족시키지 못했던 욕구를 그녀에게서 대신 얻게 됩니다. 바로 처녀로 한평생 살아야 하는 구중궁궐 속의 궁녀들 간에 은밀히 행해지는 동성 간의 애정행위였던 것입니다. 궁궐, 특히 내명부의 규율은 너무도 엄격하여 이런 행위가 발각이 되면 그 궁녀는 회초리를 맞고 궁중에서 추방하게 되어 있는데 하물며 장차 국모가 될 세자빈이 천한 시비와 그와 같은 행위를 한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치 못할 일이었던 것이죠.

세자빈 봉씨의 변태성 동성애는 시간이 갈수록 더해갈 뿐 그칠 줄을 몰랐는데 결국 이 사실이 중전에 알려지자 소헌왕후의 노여움은 대단하였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건 세자빈을 불러 이 같은 사실 여부를 문초하였더니 부끄러움도 없이 자기 소행이 당연한 듯 뻔뻔하기가 하늘을 찔렀다 합니다.

이 일로 조정 대신들은 세자빈 봉씨의 죄목 다섯 가지를 들어 폐출을 결정했으며 엽기행각을 일삼던 순빈봉씨는 결국 폐서인 되고 맙니다. 하지만, 친정으로 온 순빈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고 이를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아버지 봉려는 봉씨에게 자결을 권했지만 이마저 거부하자 결국 아비의 손에 목졸려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맡게 됩니다.

 문종이 맞이한 두 명의 여인은 분명한 악재였던 것 같습니다. 이 같은 두 번의 시련을 이겨낸 세 번째 양원 권씨의 아들 단종마저 조선 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불행한 인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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