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바람의나라]해명태자는 유리왕이 죽였다?

반응형


  드라마에서의 유리왕은 냉철함과 동시에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동부여의 막강한 영향력에 전전긍긍하다 전쟁을 피하고자 태자 도절을 볼모로 보내기에 주저하지 않는 나약한 모습과 화희(禾姬)와 치희(雉姬)의 두 여인 사이에서 갈등하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는 미련함도 모자라 곧은 신하의 바른 소리를 용납지 못했던 치졸한(?) 인물로 평하는 이도 더러 있습니다.

 아버지와는 달리 장남 도절이 자결한 후 태자가 된 둘째 해명태자는 그 용맹함과 비범함이 남달라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왕재의 길을 닦으며 성장하고 있었는데요. 졸본의 민심을 얻지 못하고 동부여의 견제를 피해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한 뒤에도 해명은 졸본에 계속 남아 소서노의 잔존세력들과 졸본 백성을 아우르며 지지기반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리왕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해명태자의 졸본에서의 성공적 정치활동(?)은 자극제가 되지 못하고 질투심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결국엔 해명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됩니다.
(드라마에서도 유리가 동부여에서 굴욕(?)외교를 하는 동안 해명은 무휼을 구출하기 위해 동부여와 전투를 벌여 유리왕을 난처하게 하는 등 앞으로의 전개에서도 유리와 해명의 마찰은 계속 될듯싶네요.)

☞ 다음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해명과 황룡국에 관한 설화입니다.

 유리왕 27년(서기8년) 봄 정월에 왕태자 해명은 옛도읍에 있었는데, 힘이 세고 무용(武勇)을 좋아하였으므로, 황룡국의 왕이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선물로 주었다.

 해명은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부러 뜨리며, “내가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활이 강하지 못한 탓이다.”
라고 말하였다.  황룡국왕이 이 말을 듣고 부끄럽게 여겼다.

 왕은 이것을 듣고 성을 내며 황룡국왕에게, “해명이 불효하니 (그를) 죽여 줄 것을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3월에 황룡국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청하였으므로, 태자가 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지금 이웃 나라가 이유 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고 간하였다.

 태자는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황룡국왕인들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하고는 마침내 갔다. 황룡국왕이 처음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를 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를 갖추어 보냈다.

 유리왕 28년(서기 9년) 봄 3월에 왕은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도(遷都)한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럴 수 있느냐?" 그리고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태자가 곧 자살하려고 하자 어느 사람이 말리며 말하였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어 태자께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는데, 이제 (왕의) 사자가 한 번 온 것으로 자살한다면, 그것이 속임수가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태자는 말하였다.
"지난번 황룡국2) 왕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 나라를 가볍게 본 것이 아닌가 하여 활을 당겨 부러뜨려서 보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하다고 하여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하며 결국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꼽고 말을 타고 달려 찔려 죽었다.

 그 때 나이가 20세였다.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 곳을 불러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이 당시 황룡국(黃龍國)은 졸본 근처에서 아마도 고구려에 예속되어 위의 설화에서처럼 고구려 왕실에 선물을 바치는 작은 소국가였던 것으로 판단되는데요. 따라서 속국이라 말해도 괜찮은 나라의 선물을 왕자가 훼손했다고 자결을 명하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음에 분명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이는 아마도 자신의 왕좌를 노리고 있다고 판단된 아들을 견제하기 위한 유리왕의 잘못된 판단이 낳은 비극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오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