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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 잡학/역사

역사를 바꾼 미국의 흑인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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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노예로서 버지니아에 처음 도착한 흑인, 1776년 미국 건국 당시 전체 인구의 19%(현재는 12%)에 달했던 이들은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1863년) 이후 미국 사회의 인종적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초 남부의 차별을 피해 흑인들은 대규모로 북부와 서부로 이동하는, 이른바 '대이주(the Great Migration)' 현상이 있었으며, 학교,병원 등 공공장소에서 백인과 유색인종을 분리하는 소위 '짐 크로(Jim Crow) 법'은 1954년 대법원 판결로 없어질 때까지 남부에 계속 잔존했습니다.  

이후 1950~1960년대에 등장한 흑인 인권 운동가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뿌리깊히 박혀있던 인종차별의 그림자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는데요.

미국의 흑인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알아봅니다. 


마르쿠스 가르베이 (Garvey Marcus, 1887~1940)

  미국의 흑인 지도자. 자메이카 출신의 사상가로 범아프리카니즘운동의 최초의 제창자이다. 1920년 뉴욕의 국제흑인개선협회(Universal Negro Improvement Association/UNIA) 대회에서 가공(架空)의 대(大)아프리카공화국의 독립선언을 채택하고, ‘아프리카인의 아프리카’ ‘아프리카로 돌아가라’를 제창하여 많은 흑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뉴욕 할렘가에 UNIA지부를 설치, 흑인모세라고 불렸다. 《니그로 월드 Negro World》지를 펴내, 흑인 영웅들의 공적과 아프리카문화를 소개하였다. 다만, 그의 너무나 공상적인 사상으로 말미암아 운동은 실패하였으나, 후일 가나 대통령 은크루마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말콤 엑스(Malcolm x, 1925~1965)

  양키들을 "파란눈을 가진 악마"라고 표현 하며 흑인으로서의 독립된 주체성을 가지고 흑백분리 독립이라는 명제로 미국백인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한  미국 흑인 해방운동의 급진파 지도자.

네브라스카주에서 말콤 리틀(Malcolm Little)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댜. 말콤의 아버지 얼 리틀(Earl Little)은 목사였지만 마르쿠스 가비를 존경하는 흑인 민족주의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신자들을 상대로 선조의 고향인 아프리카로 귀향할 것을 설교했다. 이 과정에서 백인이 말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아버지와 형제들이 살해되었으며 그후 가난과 싸우는 생활 속에서 어머니마저 정신이상이 되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말콤 엑스는 이후 학교를 중퇴하고, 21세에 강도죄로 투옥되었는데 이때 이슬람 신앙을 받아들였다. '엑스'라는 성은 그가 이슬람에 입교하면서 원래의 성을 버리고 대신 쓰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흑인들의 성은 원래 그들 조상의 것이 아니고 이들을 노예로 부리던 옛날의 백인주인들이 멋대로 붙여주었던 것이니만큼, X자를 써서 흑인의 빼앗긴 이름을 상징한다는 것이 당시 흑인 이슬람교도들의 입장이었다.

말콤 엑스는 석방 후 흑인 해방운동가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흑인의 분노를 대담하게 표명한 그의 언사와 웅변은 흑인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965년 2월 뉴욕 OAAU 연설회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인괴한들의 집중총격을 받고 현장에서 살해당했다.





마틴 루터 킹 (King, Martin Luther, 1929∼1968)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은 1919년 조지아주(州) 애틀랜타에서 침례교회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8년 모어하우스대학 및 펜실베이니아주(州) 체스터의 크로저신학교를 졸업했고 보스턴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54년 인종 차별의 중심이라고도 할 앨라배마주(州) 몽고메리의 침례교회 목사로 취임하였다.

재직 2년째인 1955년 12월, 시내버스의 흑인 차별대우에 반대하여 5만의 흑인 시민이 벌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을 지도하여 1년 후인 1956년 12월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 직후 남부 그리스도교도 지도회의(SCLC)를 결성 하고, 비폭력주의에 입각하여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얻어내기 위한 '공민권 운동'(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 등)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이때 <나에게는 꿈이 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1964년에는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66년부터 시카고를 중심으로 주택 확보 및 학교에서의 참다운 인종통합을 요구하며 실생활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차별과 빈곤 타파를 위해 활동 하였다. 또한 베트남전쟁 반대 입장을 밝힌 동시에 가난하면서 조직도 되어 있지 않은 흑인노동자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68년 4월 테네시주(州)의 멤피스시(市)에서 흑인 청소부의 파업을 지원하다가 한 모텔 발코니에서 백인인 제임스 얼 레이가 쏜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
 흑백 분리주의에 항거해 1955년 12월부터 이듬해 11월 13일까지 미국 앨라배마주(州) 몽고메리에서 일어난 흑인들의 대규모 흑백차별 철폐운동이다. 사건의 발단은 1955년 12월 1일 파크스(Rosa Parks)라는 흑인 할머니가 시내버스의 백인 좌석에 앉았다가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시내버스에서 흑백 분리'를 규정한 몽고메리 시법(市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면서 시작된 집단 파업과 버스승차거부 등의 비폭력 시위.



제시 잭슨 (Jesse Louis Jackson, 1941~)

  제시 잭슨(Jesse Jackson) 목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후계자로 자처하며 흑인 및 소수인종, 정치범, 성희롱 문제 등에 활약하고 있는 흑인 인권운동가.

98년에는 미국 월가가 킹 목사를 기리는 뜻에서 그의 생일인 1월 19일휴장토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관공서와 기업들은이날을 공휴일로 해왔으나, 월가만은 그간 흑인 인권단체의 휴장압력을 번번이 거부해왔다.

84년, 88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섰다 실패했고, 92년에는 대선출마를 선언하는 등 현실정치에 큰 관심을 가져왔었다.

잭슨 목사의 외교문제에도 여러 차례 관여해왔다. 84년 시리아를 방문, 포로로 잡혀있던 미 해군 조종사 로버트 굿맨 대위를 석방시켰다. 87년에는 쿠바로 들어가 48명의 쿠바 정치범을 석방시켰다. 90년에는 이라크를 방문, 부녀자 및 어린이의 석방을 성사시켰다. 99년엔 유고와 마케도니아 국경지역에서 유고군에 생포됐던 미군 포로 3명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2001년엔 여성 보좌관과의 혼외정사로 딸을 두고 있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으며, 2002년엔 제시 잭슨 목사 자신이 비난하거나 보이콧(불매) 운동의 대 상으로 삼았던 기업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은 것이 드러나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어떤 오후>

[출처 : 네이버 지식in, 백과사전,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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