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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바람의 화원]일본의 천재화가와 김홍도는 동일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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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론에 앞서 김홍도의 동료이자 스승으로 알려진 김응환(金應煥)에 대해 알아봅니다.

 김응환은 영, 정조대에 활동한 화원으로 벼슬은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를 역임했으며 그의 가문에서는 많은 화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김득신, 김석신, 김양신의 세 조카들을 위시하여 장한종. 이명기는 사위이고 종손 김건종과 김하종도 화원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1788년(정조 12) 왕명으로 내외 금강산을 유력하면서 그림을 그렸으며 1789년 왕명으로 일본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몰래 일본에 들어가려고 떠났으나 부산에서 병을얻어 4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상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김홍도는 김응환과는 달리 그의 외가가 대대로 화원을 배출한 집안으로 외삼촌과 외조부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결혼 뒤에는 도화서의 김응환에게 그림을 배웠으니 김홍도에게는 불과 3년 연상이었던 김응환이 스승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둘은 매우 절친하였으며 앞서 얘기한 1788년(정조 12) 금강산 기행에도 김홍도와 김응환은 함께였습니다.


  이즈음 1764년 이후 30년간 통신사의 왕래가 없었고 임진,정유왜란을 겪은 조선은 일본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했는데요. 1789년 정조는 김홍도외 김응환에게 명을내려 일본의 지도를 그려오게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김응환이 부산에서 병으로 죽자 김홍도는 그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혼자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김홍도의 첩보(?)활동 무대가 대마도였는지 본토였는지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정조의 특명으로 일본으로 간 것은 사실인듯하며 40대의 김홍도는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후 자신이 모사한 일본의 지도를 가지고 무사히 귀국을 하게 됩니다. 이때의 공으로 김홍도는 연풍현감으로 임명되었으며 1794년에도 또 한 번의 왕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 기록이 있습니다.

 정조는 단원 김홍도의 뛰어난 그림실력을 조선의 일상을 알고 싶을 때 뿐만 아니라 나라의 안위가 걸린 중요한 일에도 적절히 활용했던 것입니다.

 1794년(간세이<寬政>6년) 5월 어느 날, 에도의 극장가에 28점의 오쿠비에(大首繪:얼굴에 테포르메를 가해 그린 그림)를 들고서 홀연히 등장하여 10개월 남짓 140여 점의 작품을 제작하는 왕성한 활동을 보이다가 어느날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린 의문의 화가가 있었습니다. 이 화가는 렘브란트, 베라스케스와 함께 세계3대 초상화가로 불리지만 본명 및 생몰년조차 알 수 없고 단지 토슈사이 샤라쿠(東洲齋寫樂)로만 알려진 사람으로 마네, 모네, 드가 등 전기인상파를 비롯해서 고흐의 후기인상파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회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화가입니다.

 샤라쿠가 그린 초상화의 선이 김홍도의 필선과 유사하고, 김홍도의 국내 행적이 묘연했던 시기가 바로 샤라쿠가 일본에 등장했던 시기와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샤라쿠는 바로 김홍도였으며 활동자금을 조달하려고 풍속화(浮世繪)를 그려 팔았을 것이라고 일부 국내 사학자들은 보고 있는데요.

이영희(한일비교문화연구소장)씨는
1) 샤라쿠(寫樂)의 그림 중에는 일본어로 해석하기 한시(漢詩)가 있는데, 이것을 이두(吏讀) 식으로 해석해야 뜻이 통하는 경우가 있고, 또 글 속에 자신의 호인 '단원(檀園)'을 가르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점
(2) 김홍도의 그림 중에는 발가락 6개의 부처가 많은데, 샤라쿠(寫樂)의 부처 그림에도 발가락 6개의 부처가 있다는 점
(3) 샤라쿠(寫樂)와 김홍도의 필선(筆線)의 특징으로 붓 끝이 꺾여 올라간다는 점 등을 들어 김홍도와 샤라쿠가 동일인물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샤라쿠가 활동하던 기간에 김홍도가 연풍 현감으로 재직했던 기록도 있다하니  샤라쿠에 관한 얘기의 진위여부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있습니다.    <어떤오후>

☞ 다음은 김홍도와 토슈사이 샤라쿠에 관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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