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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돌아온 일지매의 맞수 '김자점'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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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돌아온 일지매'는 의적 일지매가 조선에서 반정을 꿈꾸는 벼슬아치 김자점(박근형 분)과 맞서는 내용으로 고우영의 만화 원작에 작가의 상상력이 추가된 팩션 사극입니다.

 김자점은 실존인물로 역사는 그를 죄인으로 평하고 있는데요.

  김자점 [金自點, 1588~165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대(代)에 병조좌랑에 이은 후 인목대비 폐모론이 발생한 이후로 벼슬길을 단념하고,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반정을 기도하여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성공으로 이끌며 1등공신으로 책록되었고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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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순검사(巡檢使) ·한성판윤 등을 맡아 능력을 인정받고 강직하다는 평판을 얻기도 했으나 얼마 못 가 탐관오리로 백성의 원성을 한몸에 받게 됩니다.

 또한,  병자호란(1637) 당시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을 저지해야 할 총책임을 맡고도 전투를 회피하여 적군의 급속한 남하를 방관하여 조선역사상 씻을 수 없는 아픔인 '삼전도의 치욕'을 가져오게 합니다.

☞ 삼전도의 치욕
인조 14년인 병자년(1636) 12월 초에 태종은 직접 12만의 군사로 조선을 침략했는데 이를 병자호란이라 합니다. 조선은 적을 맞아 결사항전을 했지만 청나라의 강력한 군대에 전황은 불리해져 인조는 세자와 남한산성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산성에는 겨우 만이천여명이 있었고. 먹을것도 50일분 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해 1월 초엔 청의 12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했으나 이 때 조정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화의를 하자는 주화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그 사이 청의 군사들이 강화도로 피신했던 세손과 왕자들이 모두 잡히게 되자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삼전동)로 나아가 청 태종 앞에 꿇고 항복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청은 조선에 강화조건을 제시합니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입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이 때문에 병자호란이 끝나고 나서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간관 들의 비난 속에 유배에 처했으나, 인조라는 든든한 후광으로 1640년(인조 18) 1월 강화 유수로, 그해 2월에는 호위대장으로 재기용되어 계속된 승진을 거듭, 1644년에는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사건 이후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고 1646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관련 글
2008/06/05 - [시청각 교육/컨텐츠속 역사이야기] - [일지매]일지매 아버지의 억울함을 알고있는 심기원과 권두형은 누구?

 이후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고, 자신의 손자인 세룡(世龍)을 인조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결혼시킴으로써 인조와의 밀착을 더욱 확고히 하였습니다.

 인조의 끝없는 신임 아래 정권을 담당하면서 청(淸)나라의 위세에 빌붙어 정치적 입지를 굳혀갔는데, 반청적인 성향의 임경업(林慶業)을 처단하는 데 앞장선 것 또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 임경업 장군
1624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여 일등 공신이 되었다. 1633년 청북 방어사 겸 영변부사가 되어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다시 쌓았으며, 명나라의 반역자 공유덕의 반란을 토벌하여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
이듬해 의주 부윤이 되었으나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함을 받아 파면되었다가, 혐의가 풀려 다시 복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우리 나라로 쳐들어온 후금 (청나라)을 맞아 백마산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잘 막아냈다.

 그 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때 참전, 명나라와 미리 내통하여 청나라에 대항하려다가 체포되었으나 금교역에서 탈출하였다. 1643년에 명나라로 가서 명군의 총병이 되어 청나라를 공격하다가 또 다시 포로가 되었다. 좌의정 심기원의 반역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조선에 돌아와, 임금으로부터 신문을 받다가 김자점의 음모로 죽임을 당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그러나 1649년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즉위하여 효종이 되자 김집, 송시열, 권시, 김상헌, 이유태 등 사림(士林) 세력들이 대거 조정에 등용된 후 이들에 의해 영의정에서 파직당하고 홍천에 유배당하게 됩니다.

 이에 앙심을 품고 유배지인 홍천에서 청나라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鄭命壽)등에게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청에 밀고하면서 송시열의 장릉(長陵)의 지문(誌文)을 청나라에 보냅니다. 이 글에는 청나라의 연호(年號) 대신 명의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이에 발끈한 청나라는 대군을 국경에 배치하고 그 진위를 조선에게 묻게 됩니다.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을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한 후인 1651년 12월 효종 2년 진사 신호(申壕) 등이 원인 제공자 김자점의 역모를 상소를 올려 고하였고 김자점은 다시 광양으로 유배되고 맙니다.

 1651년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사건이 문제가 되고 유배된 처지에서도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하다가 결국 아들 익(釴)과 함께 능지처참을 당하고 맙니다.

 이를 “김자점의 역모사건”이라 합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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