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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천추태후]성종은 정말 나약한 왕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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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 욱(태조 왕건와 선정왕후 소생)과 선의왕후의 2남인 성종은 981년(경종 6년) 사촌형인 경종이 위독하자 내선(內禪)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이때 경종에게는 성종의 여동생인 헌애왕후(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이미 2살 된 아들 송(목종)이 있었으나, 너무 어려 국사를 맡을 수가 없었기에 대신 왕이 된 것이죠.

 성종(김명수 분)은 왕이 되기 전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셋째딸인 유씨(문덕왕후 : 이현경 분)를 아내로 두고 있었습니다. 드라마에서처럼 유씨가 태조의 손자이자 수명태자의 아들 흥덕원군 왕규에게 시집갔다 딸까지 있는 상황에서 성종에게 재가한 것은 광종 이후 정착된 족내혼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한 일환으로 판단됩니다.

 이처럼 성종이 광종의 사위라는 것도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중요한 작용을 했으며 광종의 딸 유씨와 왕규사이서 태어난 딸은(드라마에서 유씨의 병시중을 드는) 후에 고려 7대 왕 목종의 왕비 선정왕후가 됩니다.

 성종의 두번째 부인인 문화 왕후 김씨(문정희 분)는 선산 출신의 호족인 김원숭의 딸로 성종이 중앙집권체제 확립을 위해 신임했던 최승로와 같은 신라호족 출신과 친밀한 유대관계로 자신의 여식을 성종에게 시집보낼 수 있었습니다.

 문화 왕후 김씨는 드라마에서처럼 연흥궁주에서 현덕궁주로 불리다 딸은 낳은 후 왕비로 책봉됩니다만 그녀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습니다.

문화왕후 김씨

문덕왕후 유씨


 성종의 가장 큰 업적은 유교사상에 기반을 둔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인데요. 광종 이후 형성된 유교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성종은 유교적 소양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처럼 성종이 최섬를 대표로 하는 신라계의 도움으로 왕이되는 설정은 작가의 상상력일 뿐입니다. 광종, 경종을 거치면서 이미 왕권은 견고해졌으며 이 과정에서 호족들의 군사기반도 많이 약화 되었기에 드라마에서 군사를 동원한 체제전복을 기도하는 설정은 참으로 어이없을 뿐입니다.

 또한, 성종이 가장 신임을 했던 최승로가 드라마에 등장하지 않는 것도 철저한 고증에 바탕을 둔 역사물로서가 아닌 여걸 천추태후의 극적인 일생을 부각시키기 위한 제작진의 의도적인 인물삭제인 듯싶습니다. 최승로라는 인물이 없는 드라마에서의 성종은 신라계와 북방계의 권력 싸움에서 갈팡질팡하는 나약한 왕으로 밖에 비치지 않은 게 많은 아쉬움으로 남네요.

 성종이 최승로라는 인물을 신임하게 된 것은 즉위 원년, 체제를 정비하고 정치이념을 명확히 할 목적으로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채택했기 때문인데요.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른 군신관계 정립과 광종 대의 노비안검법으로 양인이 된 사람들을 다시 노비로 되돌려 놓은 노비환천법 실시를 주장하여 귀족 중심의 사회신분제도를 확립할 것을 역설하고 있는 '시무 28조'가 유교사상에 심취해있던 성종의 가치관과 통했기 때문입니다.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유교사회 건설을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성종은 983년 2월 최승로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임명한 후 본격적인 체제정비 작업에 돌입합니다. 3성 6부제를 도입하여 중앙관제를 확립하고, 10도 12목으로 지방 조직을 중앙집권적 틀 속으로 완전히 복속시킴으로써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죠. 서무를 분장(分掌)한 7시(寺)를 설치하였으며 언론(言論)을 맡은 사헌부(司憲府), 군국(軍國)의 기밀기관인 중추원(中樞院) 등을 두었습니다.

 또한, 3성 6부와 12목 설치로 행정조직을 대폭 개편한 성종은 유학과 생활학문 진작을 위해 일관된 교육정책을 단행했으며 유교적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하고, 12목에다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보내 지방 교육을 장려하였습니다. 지방에는 목사를 파견하였고, 지방의 중소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였으며 권농정책에 힘썼으며 각 지방에서 유학이나 의술이 뛰어난 인재들을 중앙으로 불러 관직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고려초 혼란스러웠던 분위기는 성종 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안정되었던 것은 사실이며 지금까지 그를 성군으로 얘기하는 부분도 이에 있는 것입니다.

 성종은 내외적으로 많은 치적을 쌓다가 997년 음력 10월에 병이 위독하여 38세의 나이로 조카인 개령군(開寧君: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망합니다.


 한편, 성종의 송나라에 대한 치나칠 정도의 친밀한 우호관계는 3강(송-거란-고려)을 형성하던 거란에는 위협으로 비추어지고 있었죠. 당시 동북아역사에서는 중국에서 송나라와 거란이 서로 세력을 넓히고자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려는 거란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면서 오로지 송나라와의 친분을 대외적으로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자신들이 송나라를 치는 틈을 타서 고려가 거란의 땅을 빼앗아 갈지도 모르니 송나라와의 전쟁에 앞서 먼저 고려를 점령하기로 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거란의 제 1차 침입입니다.

 성종의 유교사상에 기반을 둔 치세로 당시의 고려가 평화로웠던 건 사실이나 지나치게 비폭력을 추구했던 온건파였기에 고려의 군사력은 미흡하기 그지없었으니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는 거란의 기세에 조정은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울것을 주장한 강경파가 맞서게 됩니다.

 이후 그 유명한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약속을 해준 대신 거란은 여진의 영토 압록강 동쪽 땅(강동 6주)을 고려에 내어주며 철군합니다. 거란의 제 1차 침입은 이렇게 끝나지만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않다가 결국 두 번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다시 받게되어 고려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됩니다. <어떤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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