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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선덕여왕]성골과 진골이 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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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진평왕은 사위이자 사촌동생인 용수(박정철 분)의 태자 책봉을 명했습니다. 하지만, 천명공주의 남편인 용수는 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되며 성골에서 진골로 족강(族降:신분이 낮아짐)이 된 터라 화랑들은 진골이 태자가 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이에 용수는 전투의 선봉에 서서 큰공을 세우고 이를 무마하려 했지만 결국 미실의 계략으로 천명공주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데요.

도대체 신라시대의 신분인 성골과 진골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요?

 골품제도는 혈통의 존비(尊卑)에 따라 정치활동에서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주어지는 제도로서 성골(聖骨)·진골 및 6~1두품(頭品)까지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요.  성골과 진골(聖骨—眞骨)은 신라시대의 신분제인 골품제도(骨品制度)의 등급으로 둘 다 신라 사회의 최고 신분층인 왕족이긴 합니다.

하지만, 성골과 진골의 차이나 구분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고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가설만 존재합니다.

1.진흥왕의 직계(성골) 및 방계(진골)를 구별하기 위한 표현이다.
2.성골은 왕족 내부의 혼인으로 태어난 집단이고, 진골은 왕족과 다른 귀족의 혼인으로 태어난 집단이다.
3.같은 왕족이면서도 성골과 진골로 구별되는 것은 모계(母系)에 의한 것인 듯하다.
4.정치적인 면에서 구분하여 왕실 직계의 왕위 계승자 및 왕위 계승을 보유할 수 있는 제한된 근친자를 포함하여 성골이라 칭하고, 그 외 왕위 계승에서 소외된 왕족을 진골이라 하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출처 : 위키백과사전]


 일반적으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부터 진덕여왕까지의 왕족은 성골, 무열왕 이후의 왕족을 진골이라고 해석하나 드라마의 모티브가 된 화랑세기에서는 또 다른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바로 성골이란 부계와 모계가 모두 왕족인 현재의 왕의 형제와 자녀가 1대에 한하여 가진 골품인 것으로 아들과 딸을 막론하고 왕위계승권을 지닌 1대 이내의 후손까지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왕궁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유에서 왕궁 밖을 벗어나 살거나 왕족이 아닌 쪽과 결혼을 할 경우는 골품을 잃게 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아마도 친자확인을 과학적으로 할 수 없었던 신라 시대에 왕실의 혈통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장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설로는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왕후 박씨 계통을 진골, 지소태후 계통을 성골이라 얘기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고구려,백제의 경우 왕에게 아들이 없으면 왕족중 유력 인사가 왕이 되었지만 신라의 경우 성골이 아니면 왕이 될 수 없었기에 유일한 성골이었던 덕만이 여자였지만 선덕여왕이 된 것이죠.



 드라마가 화랑세기를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한 것임으로 드라마 내용중 김춘추의 예를 들어 설명을 합니다.

 김춘추의 어머니는 천명부인이며 아버지는 금륜왕(진지왕)의 아들인 용수(또는 김용춘)인데 진지왕이 폐위되어 출궁되면서 성골에서 진골로 계급이 낮아집니다.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부인 역시 왕위를 덕만에게 양보하기 위해 출궁하면서 골품을 상실하여 김춘추는 성골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선덕여왕이 성골을 만들기 위해 용춘과 용수와 모두 관계했음에도 후사가 없었기에 선덕여왕의 뒤는 그녀처럼 유일한 성골이었던 진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진덕여왕은 동륜태자의 아들인 국반갈문왕의 딸입니다.)

 안타깝게도 진덕여왕 역시 후사가 없으므로 결국 김춘추에게 왕위는 넘어오게 되니 그가 바로 태종무열왕이 됩니다. 이로써 성골만이 왕이되던 시대가 끝이난거죠.

 이 후 태종의 뒤를 이은 문무왕은 그 모친이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였으니 김유신이 가야국 출신으로 결국 신라 왕의 혈통은 가야의 피까지 섞이게 되죠. 따라서 더는 성골, 진골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 해지게 됩니다.

 진골은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의 최고 관등에 오를 수 있으며, 각 중앙관서의 장관직을 독점하였으며 국가로부터 식읍(食邑)이나 녹읍(祿邑)을 받았으며 사병(私兵)을 양성하고 사원을 경영하여 재산을 빼돌리는 등 호사스런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진골귀족의 세력이 점차 비대해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왕권은 약해졌으며, 이후 진골귀족 간의 왕위쟁탈은 사회에 혼란을 가져와 후삼국으로 분열되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 <어떤오후>

[참고자료 : 네이버 지식IN, DAUM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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