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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천추태후]무예대회에서 만난 양규와 김숙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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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방영된 KBS 대하사극 '천추태후'에서는 목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는 천추태후(채시라 분)가 국방력을 강화시키려는 방법으로 무예대회를 열어, 양규(홍일권 분), 김숙흥(홍성호 분) 등의 인재를 발탁하는데요.

무예대회에 앞서 양규는 서희와 강감찬이 함경도 일원에서 발견한 인물이며, 김숙흥은 천추태후가 유배를 가 있던 울산에서 눈여겨보았던 인물로 두 사람이 천추태후 주요인물과의 첫 만남, 무예대회를 통한 또 한번의 재회는 작가의 상상력일 가능성이 크지만 드라마 전개상 이후 펼쳐질 그들의 활약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종이 아들 없이 죽고 경종의 아들인 목종(천추태후의 아들)이 즉위하자 김치양 등의 외척 세력은 천추태후와 결탁하여 정계에 다시 등장하여 권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그것도 모자라 김치양은 천추태후와 불륜의 아들을 낳고 그를 책봉하고자 대량원군(大良院君 후의 현종)을 살해할 모의를 하다가 실패하였으며, 목종까지 죽이려다 이또한 실패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목종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중추사 우상시 겸 서북면 도순검사로 북쪽을 지키고있던 강조를 개경의 궁궐 수비와 대량원군의 신변보호를 위해 부릅니다.  목종의 부름으로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온 강조는 혼란의 책임이 왕에게도 있다하여 목종을 폐위시키고 김치양 일당을 처형했으며 대량원군을 추대하여 현종으로 즉위시킵니다.

 바로 이것이 거란의 2차 침입의 빌미가 되고 마는데요. 1010년(현종 원년), 요나라 성종은 강조가 목종을 강제 퇴위 시키고 대령군(현종)을 왕으로 추대한것을 구실로 직접 기,보병 40만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실이였을뿐. 실제 고려를 침략하여 거란의 땅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는데요.
 
 요나라 성종은 자신의 군대를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하고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평북 의주군 위원면)를 직접 공격했다. 그러나 흥화진을 지키던 장수는 불세출의 명장, 서북변 도순검사 양규(楊規)였으며, 구주(龜州)에는 별장 김숙흥(金叔興)이 버티고 있었는데요.


 거란에게 여러 번 항복을 권유받았으나 양규는가 응하지 않자 거란은 20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통주(通州)로 출동하여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을 격파하고, 항복을 권유하는 서신을 강조가 쓴 것처럼 꾸며 흥화진에 보냅니다.

 이에 양규가 왕의 명령만 받을 뿐 강조의 지시는 받을 수 없다고 버티자 거란이 포로로 잡은 판관 노전(盧戩)과 합문사(閤門使) 마수(馬壽)를 보내 다시 항복을 권해오자, 도리어 그들을 잡아놓고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거란군은 곽주로 가서 성을 함락시켰는데 이때 양규는 자신의 정예기병 7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통주로 가 거기서 강조의 부하였던 군사 1,000여 명을 모아 곽주로 다시 가서 거란군 6,000여 명을 죽이고 성 안의 백성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기는데 성공합니다.

  이듬해 1월 거란군이 개경까지 진격한 뒤 고려측의 정전 제의를 받아들이고 군사를 되돌리자, 무로대(無老代)에서 돌아가는 거란군을 불의에 습격하여 2,000여 명을 죽이고 포로로 끌려가던 남녀 3,000여 명을 구했으며 다시 이수(梨樹)에서 접전을 벌이고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적병 2,500명을 죽이고 포로 1,000여 명을 탈환합니다.
 
 3일 후에는 여리참(余里站)에서 1,000여 명을 죽이고 포로 1,000여 명을 탈환했고 그뒤 다시 애전(艾田)에서 거란군의 선봉을 요격하여 1,000여 명을 죽이는 등의 큰 공을 세우지만 그러나 얼마 후에 퇴각하는 요나라군을 치기 위해서 또 한번의 출정을 감행합니다.
이때, 구주에서 중랑장 보량(保良)과 함께 거란군 1만을 물리친 귀주별장 김숙흥이 양규와 합세하는데요.

 하지만, 성종이 이끄는 요나라 본대가 고려군을 불시에 공격하였으며 고려군은 하루가 지나도록 용감히 싸웠으나 압도적인 숫자와 누적된 피로, 부족한 병기로 인해 군대는 전멸하였고 양규와 김숙흥은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가던중 수백개의 화살에 맞아 장렬히 전사합니다.

이후 양규와 김숙흥은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함께 추봉되었습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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