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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천추태후, 대량원군은 왕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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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대하사극 '천추태후' 5일 방영분에서는 천추태후가 임신한 것을 안 목종이 이에 불만을 품고 이종사촌인 대량원군에게 선위할 뜻을 대신들에게 알리면서 또 한 번 천추태후와 목종 사이에는 불신이 싹트고 마는데요.

 대량원군은 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황보설, 신애분)와 안종 왕욱(경주원군,김호진 분)의 불륜관계로 태어난 아들로 이 사실을 안 성종은 안종 왕욱을 경상도 사수현(泗水縣·사천)으로 귀양보냅니다. 이때 헌정왕후는 귀양을 가는 왕욱을 배웅하고 돌아오다 집 앞에서 산기(産氣)를 느끼고 길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대량원군입니다.


 한편, 어머니인 헌정왕후가 죽고 아비인 안종 왕욱도 귀양을 가있는 터라 대량원군(왕순)은 두살 때까지 궁중에서 길러지는데요. 어느 날 왕순이 성종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 아버지라는 말을 하자 이를 본 성종이 눈물을 흘리며 왕순을 귀양가 있는 아버지에게로 보내줍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아버지인 안종 왕욱 마저 사망하므로 왕순은 5살에 고아가 되어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게 되죠.

 성종이 죽고 목종이 왕이 되자 천추태후가 섭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얼마 안있다 그녀의 정부인 김치양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게 되죠. 이를 계기로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목종의 후계자로 이들의 아들을 추대하려하지만 그들에게는 대량원군이라는 목에 가시 같은 존재가 있었던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김치양을 경계했던 목종이 후사를 대량원군에게 물려줄 징조가 보이자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의 머리를 강제로 깎게 한 다음 개경의 사찰로 쫓아버리게 됩니다. 이것도 모자라 대량원군을 암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게 되니 그야말로 대량원군의 목숨은 바람 앞에 등잔불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맙니다.

  몇 년 뒤 목종이 병을 얻자 이를 기회로 김치양은 수차례 자객을 보내어 대량원군을 죽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대량원군은 목종에게 구원요청의 편지를 보내지만 목종의 측근 유행간에 의해 전달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유행간의 찢어버린 대량원군의 다급한 편지는 우여곡절 끝에 목종에게 전달되고 그의 명령으로 절에서 살고 있던 대량원군을 대궐로 불러들이는 한편, 서경 도순검사 강조에 대량원군을 보호할 것을 명하며 개경으로 강조를 불러들입니다. 하지만, 강조는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내려오던 중 마음을 바꾸어 이러한 혼란의 책임이 왕에게도 있다 하여 목종을 폐위시키고 김치양 일당을 처형했으며 대량원군을 왕으로 추대하니 이 사건을 '강조의 정변'이라 하며 이 사건으로 왕이 된 그가 바로 고려 8대왕 현종입니다.

 현종이 즉위한 다음해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하자 강조에게 30만 군대로 방어하게 했으나 강조가 패하고 개경이 점령당하는 바람에 나주로 피난갔다가 환도하지만 끝내 거란의 친조요구를 받아 들이지 않고 6성 요구도 거절하였습니다.

 같은 해 거란이 현종의 입조(入朝)를 요구하며 다시 쳐들어왔으나 강감찬(姜邯贊)이 구주(龜州)에서 거란군을 대파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는 등 즉위 초에는 거란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만 이후 거란과의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기민() 구제에 힘썼으며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도모하였으며 대장경의 제작에도 착수, 6천 권의 대부분을 완성하게 하는등의 큰 업적을 남깁니다. <어떤오후>

[출처 : 네이버, 다음 백과사전, 네이버 지식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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