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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선덕여왕, 미실은 왜 왕후가 되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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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에는 인통이라하여 왕비를 배출하는 왕비를 배출하는 가문과 혈족이 있었는데 진골정통(眞骨正統)과 대원신통(大元神統)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진골정통은 옥모를 기원으로 미실의 남편인 세종의 어미인 지소태후로 대표되며, 대원신통은 보미를 시조로 하여 진흥왕의 황후였던 사도, 사도의 조카였던 미실 등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인통을 얘기하기에 앞서 색공에 대해 먼저 얘기해야 하는데요. 색공[色供]이란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색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신라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색을 바치는 것 외에도 남자가 남자에게 색공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색공[色供]을 유교적인 관점에서 문란하다 보기이전에 적어도 신라에서는 이를 사회적 정치적 관계를 확대해 나가는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마복자란 풍습도 이런 활동의 한 예인데요. 
화랑을 따르는 무리를 일반적으로 낭도라고 하는데 낭도는 자신의 부인이 임신하면 임신한 상태에서 자신의 주군인 화랑과 관계를 맺게 합니다. 이후 아이가 태어나면 그 주군인 화랑은 그 아이의 후견인이 되며 이 아이를 마복자라고 하는데 마복자가 된 아이는 후견인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게 되죠.



동륜태자와 의 불륜으로 궁에서 쫓겨난 미실을 잊지 못한 진흥왕이 미실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려 할 때 미실은 이미 세종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요. 이때도 진흥왕은 이 아이를 마복자로 삼으며 미실을 다시 곁에 두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미실의 색공은 동륜태자와의 불륜으로 처벌받아야 마땅한 당사자의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진흥왕의 총애를 받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 것이죠.

 하지만, 천하의 미실도 이루지 못한 게 있었으니 바로 왕후의 자격이었습니다. 미실은 왕에게 색공하고 왕비가 될 것을 약속받은 몸이었으나 지소태후의 아들인 세종의 눈에 띄어 세종의 후궁이 되었으며. 이후 진흥왕에게도 색공을 하게되지만 동륜태자와의 불륜으로 궁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중에  왕비를 많이 배출했던 인통인 진골정통 세력이 더 막강했는데요. 이에 위협을 느낀 미실은 화랑의 우두머리인 원화로 있던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한 다음 진골정통을 견제하려 했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화랑들의 반대(특히 문노)로 이 또한 큰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또한 아버지 미진부가 진골인 관계로 성골이지 못한 미실의 태생적 한계도 왕후가 되기 위한 미실의 발목을 잡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왕후가 되지 못한 미실이었지만 정치,문화,사회 전방위에서 발휘한 그녀의 능력과 활약은 역대 어느 왕후보다 대단했던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입니다. <어떤오후>

[출처 : 네이버, 다음 백과사전, 네이버 지식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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