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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 잡학/역사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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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선정됐다고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9일 발표했습니다. 노벨위원회는 오바마 대통령이 국제무대에서 탁월한 외교적 능력을 발휘했고 세계 민주주의 증진과 인종·종교 간 장벽을 넘는 계기를 만들었다며 선정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로써 미국은 1906년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시작으로 모두 4명의 전 현직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인권 향상과 남북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을 받기도 했는데요.

 1901년부터 지금까지 노벨평화상을 받은 세계 각국의 대통령들을 소개합니다.


■ 1906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기업과 노동조합 사이의 쟁의에 직면하여 대통령 및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전체 국민의 이익을 도모했으며 아시아와 유럽 문제에 개입하기도 했다.
 
1906년 러일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파나마 운하 건설(1904~14)을 추진했다.




■ 1919년 우드로 윌슨 (미국)
 고답적이고 융통성 없는 이상주의자로 잘 알려졌으며, 미국의 제28대 대통령(1913~21)으로 재임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파리 평화회의에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주창했다.

베르사유 조약(1919. 10~11)에 대한 미국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신경쇠약과 반신불수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했다. 국제 연맹을 창설하는데 기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여.




■ 1971년 빌리 브란트 (독일)
 나치독재정권시절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히틀러정권에 항거하는 정치활동을 했다. 1949년 9월에 귀환하였으며, 1961년부터 1969년까지 독일연방공화국 수도 (서)베를린의 시장을 역임했다. 제4대 연방총리로 재임하는 기간(1969~1974)동안, 과거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동방 정책을 실시하는 업적을 남겼다.

빌리 브란트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1971년에 폴란드수도 바르샤바의 전쟁희생자 비석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한 사건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그가 당시 진보-개혁적인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의장이자 그 자신이 나치 독재의 피해를 입은 망명자로서 (그의 표현을 빌려)'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역사적 책임, 즉 독일을 1,2차대전 전범 국가의 오명으로부터 도덕적으로 복권시켜야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 1974년 사토 에이사쿠 (일본 수상), 숀 맥브라이드 (아일랜드) 공동 수상
 일본의 정치인으로 제61·62·63대 내각총리대신이었다. 수상 기시 노부스케와는 친형제이고 전임 수상 요시다 시게루와 친인척 관계이다.

 자유민주당에서 유일하게 4번이나 총재로 뽑혔고, 총리 재임기간은 역대 총리중 2위, 연속 재임기간은 역대 총리중 가장 긴 7년 8개월(2,798일)이라는 최장수 재임 기록을 세웠다. 퇴임 후 1974년에 "핵무기를 만들지도, 갖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라는 비핵 3원칙을 내세운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 1978년 안와르 엘 사다트 (이집트), 매나 헴 베긴 (이스라엘)

-안와르 엘 사다트 (이집트=대통령)

1938년 이집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다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추축국의 도움으로 영국을 이집트에서 몰아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942년 영국 당국에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고, 수감 중에 감옥에서 탈출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50년에 낫세르의 자유 장교단에 가입했으며, 이집트의 무하마드 알리 왕조를 전복하는 군사 쿠데타에 적극 가담했다. 쿠데타 당시 사다트는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여 이집트 국민들에게 왕정 전복 쿠데타 소식을 방송하기도 했다.

나세르의 후임으로 1970년부터 이집트의 대통령이 된 후, 사다트는 이집트 정권의 독재적인 성격을 완화하였다. 1973년에는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을 이끌었으며 소련과의 밀접했던 관계를 끊고,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1979년에는 워싱턴에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이 점에서 살라딘과 비교될 수도 있음) 그러한 그의 평화에 대한 공헌으로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 총리와 함께 1978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사다트는 이스라엘과의 화해를 반대하는 자신의 정적에 의해, 군사 퍼레이드 도중에 암살되었다.


- 매나 헴 베긴 (이스라엘=수상)

 폴란드에서 출생하여, 바르샤바 대학을 졸업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시오니즘(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 민족이 뭉쳐서 나라를 세우려는 운동)에 참가한 그는 1942년에 조국 이스라엘로 돌아와 유대 해방 지하 단체의 총사령관으로 일하였다.

 그 후 자유당 당수·무임소 장관 등을 거쳐 1977년 수상이 되었다. 그는 이집트와의 오랜 적대 관계를 씻고 중동의 평화를 위해 힘써, 1978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 1983년 레흐 바웬사 (폴란드)
 폴란드의 노동운동가, 공산 폴란드 최초의 연대자유노조(Solidarno)의 의장, 초대 직선 대통령(1990~).
폴란드 국내외에서 수백만 명의 폴란드 노동자들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인정되었으며, 198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목수의 아들인 바웬사는 국민학교와 직업학교 교육만 받고, 1967년 그다인스크에 있는 대규모 레닌 조선소에서 전기공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거리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총에 맞고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폴란드의 참된 자유노조를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폴란드 국내외에서 수백만 명의 폴란드 노동자들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인정되었으며, 198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 1987년 오스카르 아리아스 산체스 (코스타리카)
 중미평화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코스타리카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대부호 가문에서 태어난 아리아스는 코스타리카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영국에 있는 에식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대에 그는 중도사회주의를 표방했던 국민해방당(PLN)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72년에 호세 피게레?페레르 대통령 정부에 기획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977년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1979년에 국민해방당의 서기관으로 선출되었으며 1986년에는 총선거를 통해 코스타리카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 1990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구 소련) 
 러시아의 정치인으로 제8대·9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수반 겸 당 서기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부터 91년도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 1985년부터 1990년 3월까지는 소비에트 연방의 국무총리에 있었으며,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였고, 이는 소련을 비롯한 중앙유럽 구 공산주의 국가들의 개혁과 개방,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 1993년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레데리크 빌렘 데 클레르크(남아공) 공동수상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평등 선거 실시 후 뽑힌 최초의 대통령이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 그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지도자로서 反-아파르트헤이트운동 즉, 남아공 옛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을 지도했다.

반역죄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나, 26년 만인 1990년 2월 11일에 출소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로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에는 진실과 화해위원회(TRC)를 결성하여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과거사 청산을 실시했다. TRC는 성공회 주교인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참여하였으며, 수많은 과거사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조사하였다.

인종차별 시절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투쟁을 화형, 총살등의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다면 사면하였으며, 나중에는 경제적인 보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또한 피해자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피해자 무덤에 비석을 세워줌으로써, 아파라트헤이트 시절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잊혀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저서로 뉴욕 타임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자유를 향한 긴 여정》이 있다.

■ 2000년 김대중(한국)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으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나 제5대 민의원과 제6·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민주화를 위해 오랫동안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였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선구자였으며‘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불리었다. 인권 향상과 남북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號)는 후광(後廣)이다.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忍冬草)’라 비유되며 불려졌다.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이다. 연설에 능하며,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 증서를 받았다.[1] 6.15 남북공동선언을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만나 발표하였다.

■ 2002년 지미 카터(미국)
대통령 재임 중 동서 진영간의 냉전이 엄존한 가운데 인권외교를 주창해 눈길을 모았으며,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고향인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카터 센터'를 설립해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 지구촌의 경제·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1차 북핵위기 당시 북한을 방문하여 미국과 북한의 중재에 큰 기여를 했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이 임박한 시기였다.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란 사태에 발목이 잡혀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를 받지만, 사실상 이란 사태는 카터가 해결한 것이었고, 사랑의 집짓기 운동 등으로 퇴임 후에 더 존경받는 특이한 인물로 남았다.

인권과 중재역에 대한 공로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 2008 마르티 아티사리 (핀란드)
1994년부터 2000년까지 핀란드의 대통령을 지낸 핀란드의 정치가이자 저명한 중재자로 유명하다
1994년 핀란드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재임 후에도 외교 분야에서 업적을 남겨, 미국과 러시아 정상을 헬싱키에서 만나게 했고, 유고슬라비아의 코소보 문제 협상을 중재하였다. 또 핀란드의 유럽 연합(EU) 가입을 실현시켰다. 그러나 내치 면에서는 임기 초기에 중도당 소속의 에스코 아호 총리와 마찰을 일으켰다.

2000년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임기 종료와 함께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아체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 중재,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조사 등의 국제 분쟁 문제 해결 활동을 하였고, 2005년부터는 국제연합의 코소보 특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코소보 독립을 지지하였으나,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찬반은 여전히 크게 엇갈리고 있다.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한 그의 공로로 그는 여러 차례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된 바 있으며, 2008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내용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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