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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선덕여왕의 최후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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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5일 방송된 '선덕여왕' 에서는 알천에게 알리지 않고 의원을 불러 자신의 병을 가늠하는 덕만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덕만의 죽음이 암시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실제 역사에서도 덕만의 삶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임에는 분명합니다. 비담(김남길 분)이 상대등에 오른게 645년이고 그가 난을 일을 켰을때가  647년이며, 선덕여왕은 이 비담의 난 중에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진흥왕의 죽음이후 미실의 집권으로 몰락했던 왕권을 다시 강건하게 확립했던 인물이 태종 무열왕(김춘추)라면 이것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한 것이 선덕여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 시절까지도 왕권확립의 기반을 닦기위한 그녀의 정책속에 많은 귀족들과의 잡음이 상당했을 것이라 판단되며 이러한 귀족들의 중심에 서있던 인물이 상대등 비담인 것입니다.

따라서 비담과 선덕여왕의 러브스토리는 작가의 상상력에 불과하다 판단됩니다.

그럼 15년(632년~647년)의 재위기간 동안 수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신라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비담의 난,을 겪는 와중에 돌연 사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드라마의 모티브가 된 화랑세기에서 그녀의 사망사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국사國事가 점차 어려워졌다. 공과 여러 낭두들이 낭도를 거느리고 친히 활 쏘고 말달리는 것을 익혔는데, 모인 자들을 선발하여 병부에 보충하였다.270) 공이 5년간 풍월주의 지위에 있는 사이에 낭정은 무사武事로 많이 돌아갔다.

선덕제의 병이 몹시 위독해지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모반을 하였다.

유신공이 신주新主272)를 받들어 전쟁을 독려하였다. 그 때 서울京師의 군대가 적어 공이 낭도를 모두 동원하여 먼저 그 진으로 돌격하였다. 비담이 패하여 달아나고 난이 평정되었다. 공은 그 공功을 발탁되어 호성장군護城將軍이 되었다.  -화랑세기, 24세 풍월주 천광공-

 드라마에서 처럼 비담의 난이 발발하기 전부터 덕만은 지병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화랑세기에서 그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니 실질적인 사망원인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덕만의 죽에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16년(647) 봄 정월에 비담과 염종(廉宗) 등이 말하기를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하여 반역을 꾀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8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정관 21년(647)에 죽었다.』 하고 통감(通鑑)에는 『22년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본사(本史)로써 고찰해 보건대 통감의 기록이 잘못이다.> 삼국사기 27대 신라 선덕(덕만)왕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를 종합해서 판단하면 지병이 있던 덕만이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난의 충격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듭니다.

실제 신라 최고 관직인 상대등의 위치에서 치밀한 준비를 했던 비담의 난은 그 규모와 기세가 대단하여 비담의 반란군은 여왕이 있는 궁궐까지 공격하였으니 말이죠.

 최초의 여왕이라는 타이틀로 후사없이 평생을 '삼한일통'과 '왕권확립'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펼쳤던 선덕여왕의 이러한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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