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컨텐츠속 역사이야기

[제중원]알고 보면 200% 재미있는 '제중원'

반응형
 SBS 새 원화드라마 '제중원'은 신분제가 붕괴한 구한말 천민인 백정 출신의 의학생 황정(박용우), 사대부 출신의 의학생 도양(연정훈), 선교사의 통역을 담당하던 역관의 딸에서 여의사가 되는 석란(한혜진)의 이야기를 다룬 사실을 기초로 한 픽션 드라마입니다.

 여기서 박용우가 맡은 '황정'이라는 이물은 천민인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최초의 의사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실존 인물 '박서양'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첫 회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 제중원(濟衆院)은 어떤 곳?                                                                               

제중원(濟衆院)의 전신인 광혜원(廣惠院)은 조선 말기인 1885년 2월 29일 고종이 미국 선교의사인 호러스 앨런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 재동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입니다.

 호러스 앨런(Horace N. Allen, 한국 이름은 安蓮)은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중, 갑신정변 때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해 생명을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고종의 총애를 받아 왕실부(王室附) 시의관으로 임명되었는데요. 그는 고종에게 근대식 병원을 설립할 것을 건의하였고, 고종이 이를 윤허하여 설립된 것이 광혜원으로 '광혜'는 '널리 은혜를 베푼다.'라는 뜻으로서 일반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는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병원 운영을 맡은 관리와 사무를 맡아보는 직원을 두는 등 의사 앨런을 제외하고 모두 한국 관리로 조직을 구성한 광혜원은 개원 12일만에 이름을 제중원(濟衆院)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제중원을 찾는 환자 수와 업무량이 많아지자, 선교사 J.H.헤론이 가세하여 의료활동에 종사하였으며 1886년 여의사 A.J.앨러스가 오면서 부인부(婦人部)가 설치되고, 이듬해 정부의 후원으로 홍영식(洪英植)의 집(지금의 을지로 입구 한국외환은행 본점)으로 옮겼습니다. 고종은 제중원의 의료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앨런과 엘러스에게 당상관 품계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같은 해인 1886년 3월 29일에는 양반 자제 중에서 학생 16명을 선발하여 이 중 12명이 본과에 진급하였는데, 이를 한국 근대 의학 교육의 시초로 보며 12명 중 1회 졸업생 7인 중에 드라마의 모델이 된 박서양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 백정에서 의사가 되기까지 박서양의 생애                                                                       

 박서양은 서울에서 백정(白丁)인 박성춘(朴成春)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이름은 ‘봉출'입니다. 신분제가 붕괴한 구한말에 태어났지만, 가장천한 백정의 신분으로 여전히 차별을 받으며 자란 박서양이 어떻게 대한민국 최초의 의사 중 한사람이 되었을까요?

믿지 못할 이야기는 아버지인 박성춘(朴成春)과 의료선교사 에비슨(Oliver. R. Avison)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던 박성춘을 에비슨이 신분에 관계없이 성심으로 치료하자 이에 큰 감명을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그를 스승처럼 따랐는데요.

이후 박성춘은 사회 개혁의 눈을 뜨고 나서 백정의 신분으로 1898년 10월 29일에 열린 제2차 만민공동회의 개막연설을 하며 구한말 선각자의 상징적인 인물이 됩니다.

또한, 박성춘은 에비슨에게 아들인 박서양을 맡아달라 간곡히 청하였고 이를 거절하지 못한 에비슨은 박서양을 제중원에 데리고 와 병원 청소 등의 허드렛일을 시키게 됩니다. 이후 그의 됨됨이에 반한 에비슨은 의학도의 자질이 충분히 있다 판단하고 박서양을 제중원의 정식 학생으로 받아들게 되죠.

1908년 6월 3일 김필순, 김희영, 신창희(申昌熙), 주현칙, 홍석후, 홍종은 등과 함께 제중원의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한 박서양은 대한제국 내부 위생국으로부터 한국 최초의 의사 면허증인‘의술개업인허장’을 받아 한국의 첫 면허의사가 되었고 그의 면허번호는 3번이었습니다.

그 후 오성학교·중앙학교·휘문학교 등에서 화학을 가르쳤고, 1917년까지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1918년 이후에 만주의 용정(龍井)으로 가서 구세의원(救世醫院)을 개업하여 이주해 온 동포들을 진료하였습니다.

또한, 민족교육기관인‘숭신학교’를 설립하여 학교장으로 항일교육에도 앞장섰고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 군사령부 군의(軍醫)로서 독립군의 의료지원을 책임졌습니다.

이후 일제의 추적과 탄압으로 숭신학교가 폐쇄되고 독립운동 기반이 무너지자 1936년 귀국하여 고향인 황해도 연안에서 개업을 하였으며 1940년 고양군 수색역 앞으로 이사하였고 귀국 4년 만에 55세의 나이로 병이 들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2008년 제63주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으며 2009년에는 박서양 이 1904년에 세브란스병원에서 병원장인 에비슨을 도와 수술하는 장면을 담은 유리원판 필름이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 제448호로 등재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오후>

[자료출처 : 개인 지식, 인터넷 백과사전, 네이버 지식 in]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