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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동이, 그녀의 진짜 최후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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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월화드라마 '동이'가 대장정의 막을 내렸습니다. 인원왕후의 만류에도 궁궐을 나간 숙빈은 억울한 사람들을 돕는데 정성을 쏟고 이런 그녀를 숙종은 물심양면으로 도와줍니다.

 시간이 흐른 뒤 경종의 뒤를 이어 왕이된 영조(연잉군)는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무덤을 찾아와 옛날을 추억하고 왕 다운 왕이 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숙빈과 숙종이 밝은 표정으로 포옹한 뒤 손을 잡고 걸어가는 행복한 모습이 그려졌는데요. 숙종과 숙빈의 찬란했던 사랑이 죽어서도 영원했을 거라는 여운을 남기기 위한 설정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역사속의 숙빈 최씨는 숙종이 아닌 아들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외로운 최후를 맞게 됩니다.

숙빈 최씨는 미천한 출생으로 그녀에 대한 기록은 숙종에 의해 후궁이 되면서부터 확인되고 그 이전의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미천한 신분을 반증하는 자료 또한 없으나 그저 무수리(상궁과 나인의 하인)로 지냈다는 구전이 거의 일반화된 사실로 전해져 올뿐이죠.


  숙종이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킨 지 6년이 지난 어느 날 궁궐을 거닐다가 불 켜진 한 궁녀의 방에서 폐비 민씨를 모셨던 무수리를 발견하고 감동을 합니다.

이를 인연으로 성은을 입게 되고, 곧이어 숙원·숙의·귀인을 거쳐 숙빈 이라는 정1품의 빈까지 오르게 되니 그녀가 숙빈최씨(동이)인 것이죠.



  숙빈 최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연잉군(훗날 영조)이 탄생할 때의 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데요. 숙종은 연잉군의 탄생을 크게 기뻐하며 호산청(護産廳, 왕비 미만의 후궁들이 출산할 때 출산을 돕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의 관계자들을 푸짐하게 포상하게 되는데 여기에 내구마(조선 시대에, 내사복시에서 기르던 말. 임금이 거둥할 때에 쓴다)를 하사합니다.
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9월 20일(을유) 2번째기사
숙의 최씨가 왕자를 낳다
       
숙의(淑儀) 최씨(崔氏)가 왕자(王子)를 낳았다. 준례대로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했는데, 임금이 호산청의 환시(䆠侍)와 의관(醫官)에게 내구마(內廐馬)를 상으로 주었다.
우의정 윤지완(尹趾完)이 듣고서 차자를 올려 진달하기를,
“국조(國朝) 고사(故事)를 신이 감히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효종조(孝宗朝)부터 근친(近親)·의빈(儀賓)·장신(將臣) 외에 일찍이 내구마를 내린 일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환시와 의관이 감히 받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요사이 보건대 은전(恩典)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시는데, 이 일은 더욱 과람합니다. 전하께서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칭찬하며 유시했다. 윤지완이 입조(入朝)하여 한 의논은 대절(大節)을 손상시켰다. 그러나 칠(漆)의 진공(進供)과 내구마 하사를 간한 두 가지 일은 능히 상신(相臣)의 체모를 얻은 것이라 하겠다.

 물론, 왕자를 생산함에 산모와 아기를 잘 보존함에 따른 포상은 당연하나 내구마까지 포함된 포상의 범위와 액수는 지나침에 많은 관료가 이를 막았지만, 숙종의 결단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연잉군(훗날 영조)이 진사 서종제의 딸과 혼인 시 그 사치는 실록에 기재될 만큼 도를 넘었으며, 후궁의 소생에 지나지 않는 영조의 가례가 세자의 가례를 초월할 정도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것은 당장 이해가 가지 않은 부분이 틀림없습니다.
숙종 39권, 30년(1704 갑신 / 청 강희(康熙) 43년) 2월 21일(신묘) 2번째기사
연잉군이 진사 서종제의 딸과 혼인하다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이 진사(進士) 서종제(徐宗悌)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임금이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에게 주혼(主婚)하게 하고, 서종제에게는 직을 제수하라고 명하고, 가례청(嘉禮廳)의 당상(堂上)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리고, 도청(都廳) 김문룡(金文龍)은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시켰다. 이 혼인은 사치가 법도를 넘어 비용이 만금(萬金)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때 이미 원자에 이어 세자로 책봉된 장희빈 소생인 왕자(경종)이 있는 상황에서 숙빈최씨의 자식에 대한 예우를 그리했던 것은 그만큼 그녀에 대한 일관적인 숙종의 사랑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건 이즈음 숙빈 최씨는 궁궐이 아닌 이현궁이라는 별도의 처소로 옮겨가게 된 것인데요.그 시기는 아마도 인원왕후가 간택된 숙종 28년 10월 이후부터 연잉군이 혼례를 올린 숙종 30년 4월 사이로 짐작됩니다. 그녀의 나이 32~35세가 되던 때이고요.

 숙빈이 궁궐이 아닌 별도의 장소에서 지내게 된 사유는 정확하지 않지만, 일설에는 인현왕후가 사망하고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후  인원왕후가 새로운 내명부 수장으로 전격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녀 입지가 좁아진 것으로 보입니다.

 숙종 또한 장희빈 건과 같은 참담한 사건의 후유증으로 더는 후궁들과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가미된 만남(?)을 멀리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따라서, 당시로서의 숙빈최씨가 가진 영향력이 또 다른 불씨를 키울 수도 있다는 계산도 있었기에 그녀를 견제하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이런 저런 이유로 동이의 쓸쓸한 독수공방은 시작됩니다. 하지만, 숙빈에 대한 총애는 줄어들지언정 그녀에 대한 연민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간 듯 보입니다.

 급기야 숙종은 이현궁에서 홀로 지내는 숙빈에게 전교를 내려 아들인 연잉군 부부가 살고있는 창의궁으로 거처를 옮기라는 명을 내립니다.
숙종 50권, 37년(1711 신묘 / 청 강희(康熙) 50년) 6월 22일(경진) 2번째기사
이현궁을 환수토록 하다.       
       
또 전교하기를,
“옛날의 이현궁(梨峴宮)은 곧 지금의 숙빈방(淑嬪房)이다. 주위(周圍)의 넓고 큼이 다른 궁(宮)에 비교할 바가 아니어서 연(輦)을 타고 지날 때마다 마음이 항상 미안(未安)하다. 이제는 연잉군(延?君)의 제택(第宅)으로 이미 정하였으니, 이 집에 동거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다. 이러한 뜻으로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사관(史官)은 말한다. 이 두 가지의 일은 진실로 궁부(宮府)15551) 는 일체(一體)이며 왕이 된 자는 사사로움이 없다는 뜻을 얻은 처사이며, 또 사람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성상의 마음으로 판단하였으니 더욱 그 성대한 절도(節度)를 볼 수 있다. 다만 내사(內司)는 아직도 아울러 혁파(革罷)함을 아껴 그 선(善)함을 다하지 못하니, 애석하다.

 위처럼 가마를 타고 이현궁 옆을 지날 때마다 혼자 사는 숙빈이 애처로웠던 숙종은 7년이 흐른 어느 날 여생을 아들인 연잉군과 함께 보낼 수 있게 한 것이죠.

 하지만, 그녀가 처음 혼자 기거했던 이현궁도, 아들과 함께 지낸 창의궁도 왕족이 살기에 궁이라 했지만, 사실은 숙종이 있는 궁궐과 떨어진 사가였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숙종의 곁에 갈 수는 없었지만, 아들인 연잉군의 보살핌을 받던 숙빈최씨의 작은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들과 함께한 지 5 년 뒤인 숙종 42년, 숙빈 최씨는 원인 모를 병에 걸리고 2년간의 힘든 투병 끝에 숙종 44년(1718) 3월 9일 생을 마감하는데요. 이때 그녀의 나이 49세였습니다.
숙종 61권, 44년(1718 무술 / 청 강희(康熙) 57년) 3월 9일(무오) 2번째기사
숙빈 최씨의 졸기    
       
숙빈 최씨(淑嬪崔氏)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예장(禮葬)18668) 등의 일을 예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관판(棺板)을 수송하게 하고 또 제수(祭需)를 넉넉히 보내도록 명하였다.

 무수리라는 신분에서 숙원·숙의·귀인을 거쳐 숙빈 이라는 정1품의 빈까지 오를 만큼 숙종의 아낌없는 총애를 받았던 숙빈 최씨.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희빈과 같은 또 다른 희대의 악녀가 탄생할 것을 우려한 숙종의 단호한 결단에 유력했던 내명부 수장의 후보에서 밀려난 후 두 번 다시는 숙종과 같은 공간에서 있을 수 없었던 것이죠.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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