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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속 역사이야기

근초고왕, 태자는 어라하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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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 방송된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 에서 비류왕(윤승원 분)은 백제를 위해 부여구(감우성)을 후계자로 결정하고 태자인 여찬(이종수 분)을 자결시킬 결단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부여준(한진분)과 해비(최명길 분)의 결탁으로 비류는 독살을 당하고 마는데요.


 지난 40여 년간, 비류왕에게 빼앗긴 어라하 자리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위례궁주 부여준은 비류왕의 최후를 지켜보다 비류가 조상에게 남긴 유지를 빼앗아 자리를 떠나고, 부여준이 떠난 자리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던 비류왕은 여구(감우성 분)에게 백제를 부탁하며 끝내 최후를 맞게 된 것이죠.

 비류왕의 죽음은 태자인 여찬에게는 그야말로 기회였습니다. 태자는 부여준과 결탁하여 그를 옹호한는 진씨세력의 군사 행동을 견제하고, 진비(김도연 분)와 여구를 역모자로 몰아 잡아들이게 됨으로써 비류왕의 죽음으로 비게 된 어라하의 자리는 이변이 없는 한 태자 여찬이 쟁취할 듯 보입니다만 이 과정에서 태자여찬은 큰실수를 한가지 하게 됩니다.


 바로 비류왕이 죽기 전 조상에게 남긴 유지를 생각 없이 부여준에 넘겨준 것이죠. 유지에는 비류왕은 자신의 뒤를 부여구에게 물려주고, 자신이 죽은 후 벌어진 왕자 간의 왕위 쟁탈전을 우려해 무리한 판단으로 전쟁에서 병사 4,000 을 잃게 한 죄를 물어 태자인 여찬을 사사시킬 결심을 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태자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부여준의 힘이 절실했기에 해비의 만류에도 비류왕의 유지를 부여준에게 주게 된 것이죠. 이는 결국 태자 여찬의 목을 스스로 죄게 할 것으로 판단되며 부여준은 이를 이용 어라하의 자리를 뺏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같은 예상은 실제로 백제의 왕위 계승도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 '근초고왕'은 백제 4대왕 '개루왕'에서 갈라진 고이왕계와 초고왕계(손자가 비류왕)의 대립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백제는 5대왕 '초고왕'의 뒤를 이어 아들인 '구수왕'이 6대왕, '구수왕'의 아들 '사반'이 7대왕에 오르게 되며 장자계승원칙을 지키게 됩니다. 하지만 '사반왕'이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로 초고왕의 동생인 '고이왕'이 8대왕으로 즉위하게 되는데요. 이때부터 백제왕실은 소위 장자파와 차자파간의 왕위찬탈전으로 얼룩지게 됩니다.

 고이왕이 쟁취한 왕위는 아들인 '책계왕'과 손자인 '분서왕'에게 차례대로 물려주는 데는 성공합니다. 하지만, 9대 '책계왕'은 한나라군이 침략하자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전사하였고, 10대 '분서왕'은 즉위한 후 한나라 군현세력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여 낙랑의 서쪽 현을 빼앗기도 했지만 결국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피살당하고 맙니다.

 두 왕의 연속적인 죽음은 한나라에 대해 강경책을 펴왔던 고이왕계의 동요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고이왕계에 의해 밀려났던 초고왕계의 비류(比流)가 '분서왕'의 장남(훗날 계왕, 부여준)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비류왕'이 11대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처럼 '삼국사기'에는 당시에 부여준이 어렸기 때문이라 하였으나,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충분히 언급했듯이 고이왕계와 초고왕계의 극심한 왕위 찬탈전 속에서 벌어진 결과였기 때문이죠.

 비류를 뒤를 이어 왕이 된 계왕(드라마에서 부여준)또한 불과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의문의 죽음을 맞는 것또한 이같은 치열한 왕위 찬탈전의 과정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일설에는 2년 만에 의문사로 죽은 계왕(부여준)의 뒤를 이어 여구(근초고왕)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당시 백제는 태자를 미리 정하는 관습은 없었고 비류가 죽을 당시 이미 자신의 형은 사망했을 거라는 설도 있습니다. <어떤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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